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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축제다” 경주 이(李)씨 상서공파 36대손의 장녀인 나. 우리 가족은 제사를 지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삼촌이나 아빠의 복장은 달라져도 꿋꿋하게 한복 바지와 저고리, 겨울에는 두루마기까지 다 꼼꼼하게 입고 절하시는 할아버지의 주도 아래,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최소 1년에 3번씩은 제사를 지내야했다. 6·25 전쟁 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몹시 그리웠던 할아버지는 한평생을 바쳐 족보를 만들고 선산을 유지하셨다. 아빠는 원래 제사를 지낸 기억이 없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갑자기 제사를 지내게 됐다며 어디서 족보를 사오신 게 분명하다고 추측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으니 바로 할머니 댁에서 지내오던 모든 제사를 이제 우리 집에서 맡으라는 것이었다. 비상이었다. 우..
우리 학교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의례가 있다. 입학식, 졸업식, 연고전... 또 하나, 청소노동자들의 시위도 추가해야겠다. 2011년에는 용역업체의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있었다. 2014-2015년에는 고용승계 요구가 담긴 바람개비로 본부 앞 잔디가 뒤덮였다. 2017-2018년에는 정년퇴직자 결원 충원을 요구하며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두 달 가까이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구체적인 쟁점은 달랐으나 불합리한 노동조건과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문제제기,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자의 유연성을 강제하는 ‘비정규직’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사회현상을 다루는 많은 교수들이 ‘문제’로 연구하고 강의해 온 주제다. 직제개편 과정에서 교직원들도 심각하게 직면해야 했던 주제다. 명문사립대..
0. ‘재활용 폐기물 보관실’과 휴게실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들이닥치는 매캐하고 독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코를 부여잡고 말았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둘러본 두세 평 남짓 되는 공간은 각종 청소용품과 화학약품들이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었다. 창문은커녕 환풍기도 없는 공간을 빼곡히 채운 물품 옆으로, 줄 맞춰 놓인 몇 개의 의자와 커피가 놓인 책상이 위태롭게 자리했다.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신식 건물인 제4공학관 지하에는 청소 노동자들의 휴게실이 있다. ‘재활용 폐기물 보관실’이라는 명패를 버젓이 붙이고. 아코디언이 만난 3명의 노동자는 매일 아침 5시 30분 그곳으로 출근해 옷을 갈아입고 1사람당 약 1.5개 층의 건물을 청소한다. 지난 10월 2일부터 빨간 조끼를 입고 학관 앞에서 선전전을 진..
우울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나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우울도 각양각색이라 결국 내 세계의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초록, 호수. 이들과 나는 딸, 친구, 애인으로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과 그들 각자만의 우울을 하나씩 내 삶 안으로 보듬으면서 내 세계는 두터워졌다. 우리 아빠를 사랑한 덕에 초록을 좋아할 수 있었고, 초록에 대한 애정과 내 어설픈 동행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호수를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공일오비의 화폭을 빌려 부족한 솜씨로나마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울의 이야기를 풀어내본다. 아빠> 엄마아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단단한 뿌리를 ..
참여/ 이네, 응팡, 노랑, 베개, 나루, 두별, 말랑, 재찬 영화를 본 뒤 남은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나 아닌 타인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할 때. 그 순간의 아쉬움을 모아 우리는 함께 영화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연희관 015B」에서 다루고 싶은, 다뤄야 하는 작품을 고민한 끝에 청소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 두 편 과 를 골랐다. 두 영화 모두 관객에게 불편함을 던지지만 각자만의 색깔로 서사를 펼친다는 점에서 다르다. 불편함을 담아내는 서로 다른 그 미숙함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타짜, 추격자, 황해, 도둑들, 1987. ‘배우’ 김윤석이 연기한 영화들이다.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인 영화 을 두고 ‘이런 영화가 김윤석에게서 나올 줄 몰랐다’는 말이 ..
들어가며: 과정이 아닌 존재의 청소년에 대하여 ‘한국 영화’를 떠올린다. 깡패나 조폭은 꼭 있을 것 같고,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도 한 명쯤 나올 것 같고, 돈에 눈이 멀어 윤리의식 따위 개나 줘버린 기업 총수도 나올 법하고, 무모하게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 캐릭터도 그려지고…. 줄거리와 인물 소개, 출연 배우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훤히 보이는 틀에 박힌 영화들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이 웃긴다고 생각할 때쯤, 문득 이러한 영화와 그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롭거나 악덕하거나 비열하거나 순수하거나, 그들은 모두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에게는 ‘성인 남성’이라는 주인공 디폴트값이 너무 깊게 박혀버려 더 이상 다른 인물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은 이주노동자의 ‘서울’ 안산과 이슬람교 서울 중앙성원이 있는 이태원을 잇는다. 안산에서 쭉 올라오다 삼각지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두 정거장 지나면 이태원에 이른다. 가끔은 시험에 드는 순간이 닥친다. 어느 주말 오후 한산한 지하철, 4호선 사당역쯤에서 지하철을 타면 적잖은 이주민들이 앉아 있다.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과 한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옆자리가 동시에 비었다. 아니, 한두 자리가 비었다면 그건 이주민 옆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자, 어디에 앉을까? ‘저는 차별하지 않아요’ 몸으로 말하듯 이주민 옆자리에 앉는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쓴다. 한참이 지나면, 깨닫는다. 다르긴 다르다. 냄새가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 이 불편함, 너무 익숙하다. ..
주변에 스타벅스 좋아하는 친구 하나쯤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찬가지로 스타벅스 매장도, 스타벅스 음료도, 스타벅스 제품(MD, 푸드)도 주변에서 정말 찾기 쉽다. 덕분에 작년 12월, 스타벅스 코리아는 한국 진출 17년 만에 1000호점을 돌파했다. 1999년 이대 1호점을 시작으로 현재 2017년 1조 클럽에 가입한 유일한 커피 프랜차이즈가 되었고, 많은 설문조사에서 20대가 사랑하는 브랜드 1위에 오르고 있다. 잠깐. 20대가 가장 사랑하는 카페가 아니라, ‘브랜드’다. 카페가 브랜드 가치로 주목을 받는 것, 무엇이 우리에게 스타벅스를 브랜드로써 기억하게 한 것일까? 스타벅스를 단순히 프랜차이즈 카페로 여기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스타벅스는 이제 여러 상품 중 하나의 상품으로 커피를 파는 ‘..
서재 문이 열려 있어 바닥에 사랑이가 똥을 쌌다. 이 똥은 누구의 책임일까? 1. 똥을 싼 사랑이2. 서재 문을 열어둔 누군가3. 열린 문을 보고도 닫지 않은 누군가4. 사랑이 똥을 제때 치우지 않은 엄마5. 누구도 아니고 사랑이 똥을 엄마만 치우는 분담 구조6. 사랑이에게 밥을 준 누군가7. 사료 제조업자8. 똥을 가리지 못하는 사랑이의 DNA9. 그 DNA를 물려준 사랑이의 부모10. 사랑이를 키우자고 주장한 필자11. 개를 길들인 인류의 선조12. ... 우리 집 개 사랑이는 열 살을 먹어 놓고도 아직 집 안 모든 곳이 자기 화장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서재인데, 서재 문이 열려있다면 열에 아홉의 확률로 사랑이가 남겨놓은 흔적과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가 들어가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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