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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지금, 페미니즘은 뜨거운 감자다. 자신을 ‘페미니즘 지지자’로, 혹은 ‘페미니스트’로 명명하는 여성들을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고, 나와 다수의 내 지인들 역시 그중 하나다. 그리고 이처럼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실천’은 흔한 고민거리가 된다. “페미니스트라면 -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것들 말이다. 페미니즘이 끼어든 후의 삶은 어쩌면 당연히, 페미니즘을 알지 못하던 때와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운동이라도 자연스럽게 그로써 변화된 삶의 모습, 행동으로 나타나는 무언가를 요구하곤 한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to do 리스트가 등장하고 가장 많은 논쟁점이 탄생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 즉 ‘일상에서의 실천’인 듯하다. 이제 우리는 ‘페미 판’에 잠깐만 머물러도 탈코르셋⋅비혼⋅비연애 등의 대표적인 실천 의제들과 그에 대한 담론 및 논쟁을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의제들을 먼저 제창하고 가장 가시적이면서도 단호하게 실천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 소위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한국 페미 판에서 수적으로 절대다수는 아닐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파급력을 갖는다. 이들은 “페미니스트라면 -해야 한다”의 ‘-’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확고하게 지킨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탈코르셋, 비혼, 비연애… 그리고 ‘야보힘’프로젝트 등이 그 ‘-’의 예이며, 이와 같은 ‘래디컬 식 페미니스트 자격 여부’, ‘래디컬 식 페미니즘 실천 요건’은 흔히 논쟁에 부쳐진다. 여기에 더해 ‘왜 나는 탈코르셋을 못(안) 하는가?’, ‘왜 나는 그만큼의 행동력이 없는가?’ 등을 고민하는 ‘래디컬이 되지 못한 페미니스트’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의 유효성이나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그들이 현 한국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 큰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기준의 페미니스트 요건이 격렬한 논쟁에 부쳐질 필요도, 그들의 요건에 맞추기 위해 고민하거나 맞출 수 없어 자책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실천 담론을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자.


1. ‘야보힘’프로젝트?

 ‘야보힘’프로젝트는 ‘야망 보지 힘주기 프로젝트’의 줄임말로, 탈코르셋이나 비혼처럼 겉으로 드러나면서 확인 가능한 기준이 있지는 않지만 나름의 규칙이 존재한다. “비섹스/(이성애와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비연애/비출산/비혼/비소비/비돕비(비혼은 돕는다 비혼을)”의 6가지 규칙으로 대표되는 야보힘프로젝트는 우선 옷이나 화장품 등의 ‘코르셋’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소비를 일체 중단하면서 공부하고, 스펙을 쌓고, 성공을 위해 노력하기를 요구한다. (이를 더 강하게 추진할 경우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조차도 ‘여성의 지갑을 쓸데없이 열게 하므로’ 지양해야 할 것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최종적으로는 부와 권력을 거머쥐기를 추구한다. “정상에서 만나자 보지들아” 한 마디가 야보힘프로젝트의 목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남혐’ 스탠스를 장착하고 여성들만의 연대를 추구하며, 이성애 연애와 같은 남성과의 관계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야보힘프로젝트는 현재 한 페미니스트 개인의 선택이라고만 여기기 어려운 수준이다. ‘하이스펙, 용기, 그리고 가능성’의 줄임말인 ‘하용가’와 그를 변형한 ‘바용가’가 인사말로 쓰일 정도이니 말이다.[각주:1] 다시 말해, 야보힘프로젝트는 한국 페미니즘 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유행이자 신념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오르고자 하는 ‘정상’은 무엇일까? 야보힘프로젝트가 추구하는 정상이란 꽤 일관된 형상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야망보지_힘주기_프로젝트’를 검색하면 그날 했던 공부 인증 또는 성적 인증, 합격증 인증 등의 사진이 죽 나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들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들이는 노력의 유형뿐만 아니라, 오르고자 하는 정상의 형태 역시 추론 가능하다. 이들의 정상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상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흔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상.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권력과 명예를 얻고, 재력까지 소유하는 그런 직업, 그런 위치. 그것이 야보힘프로젝트가 말하는 정상이다.

 사회에서 흔히 ‘정상적(normal) 삶’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연애, 결혼, 출산, 심지어 섹스마저도 거부하는 이들에게 ‘정상(top)’에 오르는 것은 자기 삶의 가치를 입증해주는 증거가 된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도 ‘이렇게나 멋지게’ 살고 있다는 것, 한 명의 사람이자 여성으로서 혼자 모든 성취를 이뤄내고 빛나게, 간지나게 살고 있다는 것. 래디컬 페미니스트인 내가 그렇지 않은 타인보다 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남성을 포함한 비페미니스트, 혹은 비래디컬 페미니스트 여성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자 스스로 되고자 하는 모습일 것이다.

 기성세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야망을 거세당하고 사회적 성공과 권력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기혼/출산 여성에게는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이 뒤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 그것도 ‘래디컬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이 모든 것을 일절 거부하고 야망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순서다. 분명히 이 사회에는 여성 권력자의 수가 부족하다. 그리고 연애/결혼/출산하지 않고도 사회적 눈초리를 받지 않는 여성이나 그 과정 들을 거치고도 명예와 힘을 가진 여성 표본은 쉽게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 여성(그가 래디컬 페미니스트인지 아니, 페미니스트인지 여부와는 관계없이)이 사회가 정해준 정상적 삶을 거부하고 개인적 성취와 야망을 좇는 것은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일이다. 그의 행동력을 높이 사고, 다음 세대 여성들이 살아갈 삶에 대하여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찬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여성 개인이 자기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과 그것이 하나의 페미니즘 신념, 입장 나아가 주류 페미니즘 문화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여성 개인의 선택은 자신의 페미니즘에 대한 신념과 분리될 수 있는 반면, 야보힘프로젝트는 ‘페미니즘과 사회적 성공의 연결’을 기본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야보힘프로젝트의 기저에는 “(래디컬)페미니즘이 여성을 야망으로 이끌고, 결국 성공으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적어도 이 프로젝트 안에서, ‘(래디컬)페미니즘 + 야보힘프로젝트 사회적 성공이자 정상’은 별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인 명제인 것이다.


2. (1) 그 야망은 신자유주의적 환상 안에 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을 사회적 성공과 연결 짓는 것은 문제적이며, 야망을 좇는 개인들의 합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페미니즘은 분명 한 여성에게 그의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자아실현의 욕구를 불어넣을 수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힘을 굳게 믿고, 그것을 실천하며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서 그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성공 여부가 전적으로 그의 신념과 노력에 달려있다는 가정은, 신자유주의 혹은 노력 만능주의의 전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보힘프로젝트는 사회적 성공에 대하여 페미니즘과 개인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더 나아가 그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들을 비난하고 닦달한다. 야보힘 논리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 아래, 야보힘프로젝트를 실천하지 않는 여성들은 ‘의지박약이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개돼지’로 후려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개인 역시 그러한 사회 구조적 제약을 받는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야보힘프로젝트와 같이 그 해결방안을 개인에게서만 강구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의 실천)과 개인의 성공은 분리될 수 있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야보힘프로젝트의 방법론은 신자유주의적 믿음을 재현하는 데 더해 그 자체로도 딱히 유일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수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뷰티 유튜버, 아이돌, 유명 의류/화장품 쇼핑몰 운영자 등 야보힘에 정면으로 대치하면서 이미 사회적 성공을 이룬 예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야보힘프로젝트의 규칙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않고, 심지어 금기시되는 ‘코르셋’을 소비하거나 판매한다. 외모라는, 야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그 나이대(10대 후반-30대 초반)에 웬만하면 갖기 힘든 부와 가시적인 명예, 영향력을 획득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진정한’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야보힘프로젝트의 주 실천자인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나이대가 이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각주:2] 이들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보다 사회적 정상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적어도 더 멀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한 직업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옳은가, 반페미니즘적인가를 떠나서 말이다.

 물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야보힘프로젝트를 통해 얻고자 하는 직업은 이들과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직종(아마도 교수, 연구자, 변호사 등의 고소득 전문직)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이러한 의문은 여전하다. 현재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야보힘프로젝트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그 직업을 얻은 것이 아니며, 개인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유리천장의 가능성 역시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수 임용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발탁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때 야보힘프로젝트는 이러한 다수의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그뿐만 아니라 야보힘프로젝트는 소위 ‘건물주’, ‘금수저’라 불리는 이들 앞에서도 별 소용이 없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야보힘프로젝트를 실행하는 페미니스트들보다 사회적으로/경제적으로 앞서며, 이미 정상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하지만 평범한 페미니스트가 야보힘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을 따라잡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페미니즘과 야보힘프로젝트는 정상에 오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야보힘프로젝트는 그것의 규칙을 따르기만 하면 당연히 사회적 성공이 뒤따를 것처럼 말하며 페미니스트들을 채찍질하지만,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성공은 ‘노력을 집어넣기만 하면 성공이 튀어나오는’ 자판기 같은 관계가 아니라는 거다.

 성공,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20대 중 야보힘프로젝트와 같은 성공 담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허구적이고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의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야보힘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대한 순응을 넘어, 그것을 적극적으로 강화한다. 이는 야보힘프로젝트가 개인의 삶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천편일률적으로 노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래디컬)페미니스트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출발 선상, 즉 삶의 배경은 모두 다르다. 중산층 이상, 고학벌, 서울권 (래디컬)페미니스트는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풍부하고 원대한 꿈을 가지는 것이 허용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지원을 받으며,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재도전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이가 같은 꿈에 같은 정도의 노력과 자원을 투자하고, 같은 정도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이는 페미니즘과는 다른 차원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다. 학벌주의, 수저계급론 등은 (래디컬)페미니스트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보힘프로젝트는 여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채로 마치 ‘노력’만 하면, 그것의 규칙만 따르면 정상에 오를 것처럼 주문을 왼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이 계급적/학업적/지역적으로 상이한 배경에 놓여있다는 현실을 덮어둔 채 야보힘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단절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출발 선상에서부터 뒤처진 여성(페미니스트)’에 대한 배제”일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경주에서 소외되어 온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허무맹랑하고,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출발 선상에서 앞선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좀 더 노력하라며 속 편하게 말할 자격이 없고, 출발 선상에서 뒤처진 이들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거라는 낭만적인 꿈조차 꾸기 어렵다.

2. (2) 야보힘 뒤에 남는 것

 앞서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성공을 간단한 수식처럼 취급하는 것을 자판기에 비유했다. 결론적으로 이 자판기는 ‘무엇이 됐든 개인의 노력으로 끝장을 보면, 사회적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일종의 이념형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의 주류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성공 서사의 복제본이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이 이념형, 그러니까 신자유주의적 성공신화가 허구적이라는 것은 이미 드러난 지 오래다. 한 마디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적 성공이자 정상’이라는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판기는 꽤 오래전부터, 고장 난 자판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야보힘프로젝트는 고장 난 자판기를 고치려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자판기에 계속해서 돈을 넣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가장 견고하고 바꾸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적 성공신화의 주체와 방법만 살짝 바꾸어 놓고 있다. 하지만 고장 난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음료수를 뽑는 사람 때문도, 그가 ‘노오력’을 덜 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러므로 구조 혹은 구조가 만들어 놓은 이념형, 즉 자판기가 아닌 개인에 책임을 전가하는 야보힘프로젝트의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야보힘프로젝트가 어느 정도의 수입과 권력을 최소한의 정상으로 쳐주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말하는 정상은 애초에 오르기 어렵고 오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매우 한정적이기에 ‘정상’일 것이다. (래디컬)페미니스트가 아닌 다른 누구라고 해서 노력하지 않아서, 놀고먹기만 해서 지금 정상에 있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계층의 수직 상승 이동이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야보힘하는 페미니스트들 역시 정상에 안착하는 이보다는 탈락하는 이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현재의 야보힘프로젝트가 정상의 정의만 생각해보아도 도출되는 결론을 외면한 채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페미니스트라면 해야 할 것’들을 만들어 내며, 그들을 혹독하게 매질하는 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일일까?” 자신을 옥죄어가며 야보힘프로젝트를 실천했지만 (당연하게도) 사회적 정상이라는 결과가 뒤따라오지 않았을 때, 그 허망함은 아무도 책임지고 보상해줄 수 없으며 그들 역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페미니즘을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때문에 야보힘 담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실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을 현실에 안주하기만 하는 개돼지라며 ‘패면서’ 얻는 것 역시 야보힘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으니 후에는 내가 저들보다 훨씬 앞서 있을 것’이라는, 일시적이며 상상적인 우월감/안도감에 가깝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앞서 다뤘던 신자유주의 논리에 대한 비판과 개인의 다양한 삶의 맥락 등이 삭제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어째서 야보힘프로젝트가 생각한 대로 순탄하게 진행될 수 없는지’ 확인해왔다. 결론적으로, 야보힘프로젝트, 즉 개인의 노력에 대한 맹목적인 강조는 페미니즘 그 자체에 독이 되어 돌아온다. 그것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단절과 배제를 가져옴과 동시에 페미니스트 개인을 갉아먹는다. 극단적인 자기 착취 뒤에, 결과에 대한 실망과 페미니즘에 대한 배신 이상으로 남는 것은 없다.


3. 당신의 야망을 응원하며

 노력해봤자 아무것도 안 될 테니,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패배주의를 심어주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래디컬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야망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할 권리도 없을뿐더러, 반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폭주 기관차를 방불케 하는 현재의 야보힘프로젝트의 흐름에 한 번쯤 제동을 걸고 싶었다. 야보힘프로젝트를 통해 진정 ‘정상’에 오른 사례가 비록 소수일지라도 나올지 모른다. 모든 사회적 사건에 확률이 완전히 0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러한 극소수의 성공 사례를 들며 그것을 맹목적으로 좇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성공신화 그 자체이다.

 그러니 야보힘프로젝트의 논리를 믿는 당신이, 지금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야보힘을 한다면 과연 먼 훗날에 정말로 꿈꾸고 목표했던 그 정상의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해보았으면 좋겠다. 그 상상이 어딘가 허무하고 동화적으로 보인다면, 현재의 야보힘프로젝트가 외면하며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이미 야보힘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원래 사회 운동은 힘든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잡히지 않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큰 미래를 잡기 위해 자신을 옥죄면서 삭막하고 강박적이고 피로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현재의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것이 현실에 안주하며 그저 즐겁게만 살라는 말이 아님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절대적인 결과만을 좇지 않고, 그 결과로 나와 타인을 재단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몫만큼 최선을 다하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스트 개인이 더 행복해지는 길임과 동시에, 그들의 야망 역시도 꾸준히 지치지 않고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페미니즘이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다.

 

 야보힘프로젝트의 주체는 야보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의 여성들이 진정 야보힘프로젝트의 주인이라면, 야보힘의 논리 안에 모든 다양한 개인이 욱여넣어 지는 지금의 방식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글이 페미니즘과 당신의 꿈, 그리고 야망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로써 내린 결론이 무엇이든 -그것이 설령 현재의 야보힘일지라도- 그 결정이 당신의 미래에 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의 꿈과 야망, 미래를 응원한다.

 

 

글 편집위원 말랑(mallang015b@naver.com)


  1. 하이(hi)를 대체해 '하용가‘가, 바이(bye)를 대체해 ’바용가‘가 쓰임. [본문으로]
  2.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등의 sns에서 ‘야보힘프로젝트’의 이름을 달고 올라오는 게시물들을 보면, 대학 입시 준비나 취업 준비 등의 내용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야보힘프로젝트 실천자들의 대략적인 연령 파악이 가능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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