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페미니즘

[한국남성展] 남페미가 어쨌다구?

연희관공일오비 2019. 3. 28. 11:15

제목은 현실문화에서 2015년에 나온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에서 따 왔다.

[”남자가 어쩌다가...“]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람들에게 남페미’ ‘버팔로’ ‘보빨러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사람 중 하나다. 우선 그 배경부터 설명을 간략하게 해야겠다. 나는 15년에 메갈리아가 생기고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이 생기고 나서도 생각에 별 변화가 없던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에도 완전히 남자들만의 세상에서 살았고, 중고등학교는 모두 남학교여서 또래의 여성과 대화를 제대로 나눠 본 적도 손에 꼽는다. 비슷한 환경에 있던 남성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나 또한 성차별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이는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여성에게만 건네어지는 종류의 말들에 대한 인식이라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아리 친구가 다른 곳에서 예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친구의 설명을 통해 나는 맥락, 표정, 말투 등 언어적인 것에 포함되지 않는 요소들이 어떤 단어를 성희롱으로 만들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미러링에 불쾌감을 느끼고, 그 너머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던 흔한 남자 1이었다.

    그러다 16년에 강남역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명백히 여성을 겨냥했다는 점,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미 묻지마 살인혹은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의 절대다수는 여성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남역 사건이 정말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는 것을 보고, 공중화장실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감각이 정말 심각하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비로소 나는 조금씩 고민을 시작했고,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없는 반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많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맞벌이에 둘 다 집안일을 골고루 나눠서 하는 부모님과 평생 살아서, 가정 내의 성차별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인터뷰들, 조사된 통계들은 너무나 명백했다. 내가 겪었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명백히 지금 사회의 현실이었다.

    주로 범죄와 통계를 거쳐서 나는 문화적인 데에 이르렀다. 현재의 문화는 어떻게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대우하는가, 그저 다르기만 한가, 다르게 대우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다른 기준과 시선은 같은 건 같게, 다른 건 다르게라는 말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기술(description)은 나아가 달라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어졌다. 이 명령은 사람들의 시선과 이를 반영하는 미디어를 통해 꾸준히 하달된다. 내가 살던 현실과 여성들이 살던 현실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걸 세상이 증언하고 있었고,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그 뻔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이제 너무나 황당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소위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 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채롭게 욕을 먹고 사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겪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앞의 과정을 거쳐 남페미라고 불리게 된 내가 어떤 논쟁을 겪었고, 여기서 어떤 피로를 느꼈으며, 그것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왜 그런 피로 속에서 살면서도 계속 목소리를 내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워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아마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 아닐까. 정확히 저 문장이 아니더라도,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는 아주 흔하다. ‘워마드의 자리에 혜화역 시위’, ‘미러링’, ‘메갈(리아)’, ‘가짜 미투’, ‘무고등을 넣어도 충분히 성립하며, 대체로 나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은 받은 질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 중 몇 명으로부터 저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질문들은 똑같았고, 반응까지 비슷했다. 그리고 인터넷 댓글에서 보던 논리들과도 너무나 비슷했고, 통사구조마저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너무 과격한 것 아니냐”, “한국 페미니즘은 변질된 것 아니냐”,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설득을 하면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제는 효과가 없다”, “남자들에게 불쾌감만 주는 게 무슨 성과가 있느냐는 말이 돌아왔다. 사실 운동의 성과는 애초에 바로바로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문화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운동에 대해 자꾸만 효과를 운운하며 우려를 표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들 중 대부분은 평소의 다른 어떤 운동에 대해서도 그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입 다물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문제는,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잘 모를 때에 배우려고 하는 반면에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메갈리아 안에서 어떤 논의가 오가고 있는지, 페미니스트들 안에서 미러링에 대해 어떤 논의가 오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운동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하고자 할 때의 기본은 운동의 주체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논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후자는 빠져 있었다. 애초에 알려고 들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나에게 연락한 친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나에게 자꾸 자신의 의견을 확인받으려고 했다. 그들의 문장은 물음표로 끝났지만 대부분 설의법이라고 봐야 했다. 대체로 핵심은 어쨌든 과격한 건 맞지 않느냐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일부의 사례에 흥분하곤 했다. 일베도, 소라넷도, 성범죄자도, 남톡방도 일부이니 일반화하지 말라던 사람들이 더욱 소수이며 역사도 짧은 메갈리아, 워마드에는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이전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친구도 난데없이 혜화역 시위에서 남자 욕을 그렇게 해대는데 이게 말이 되냐며 나에게 화를 냈다. 혜화역 시위에 참가할 자격도 없던 나는 우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남의 어원이 단지 한국 + 남자라는 데에는 다른 의미로 쓰이지 않느냐며 화를 내던 사람이 보이루의 어원이 단지 보겸 + 하이루라고 항변하는 모습은 콩트에 가까웠다.

    한두 명의 발화를 가져와서 페미니스트는 다 이렇냐며 비난을 한다든지, 어떤 여성이 한 말만 가져와서 이게 페미니즘이냐라고 한다든지 하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적고 보니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논쟁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논쟁보다는 일방적인 낙인찍기와 분노 표출에 가까운 경우가 대다수였고, 페미니즘 이야기는 결코 워마드나 미러링, 혜화역 시위 외의 주제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니 애초에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들의 불만을 나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 내 친구도 페미니즘 하는데 걔도 워마드는 싫어하더라내 친구로 삼고 싶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남자는 닥쳐”] 

    이 문장도 정말 익숙하다.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한국에 페미니즘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항상 훈계하는 남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음에도 이들은 이론을 공부하여 그것으로 선배행세를 하기도 했으며, 오히려 페미니즘을 이용하여 여성들을 침묵시키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도 항상 비슷한 일이 벌어져 왔다.[각주:1] 그러니 페미니즘을 모르는 남성들과는 답답해서 대화하기가 힘들고, 페미니즘을 아는 남자는 가르치려 드는 상황에 어떤 남자의 말이 듣기 좋겠는가? 사실 나는 남자는 닥쳐라는 말이 내가 남페미로서 들은 말들 중 가장 중요한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 말은 침묵시키기라는 객체화[각주:2]의 한 방식에 대한 대항발화, 혹은 맨스플레인[각주:3]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나 또한 당연히 저 이야기에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발화권을 제한당하는 일이 유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훈수를 두거나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떠들지 않고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니 저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기보다는, 간단히 말하면 낄끼빠빠[각주:4]를 잘하라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다. 남성의 발화 권력을 인지하라는 것 또한 내가 가능한 발화 범위를 넘어가지만 않으면 충분히 제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나는 다음의 말을 듣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무얼 말해도 되고 무얼 말하면 안 되느냐? 너무 애매하다!” 나는 요리가 떠오른다. 요리 영상을 보면 가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양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소금을 적당히 넣고”, “약불에서 적당히 익히고, 망할. 도대체 얼마만큼이 적당하다는 걸까? 처음에는 나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요리하면서 간을 안 보고도 소금을 적당히 넣을 수 있게 됐다.

    어떻게 이게 가능해졌나? 간단하다. 계속 노력했다. 나는 요리를 잘하고 싶었고,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요리하고, 실패도 하고, 욕도 먹어 가면서, 그리고 내가 만든 음식이 얼마나 짠지 내 입으로 직접 느끼는 과정이 필요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몸이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기로 했다. 아무리 논쟁이 뜨거워도 가능하면 탈코르셋에 대한 의견을 강하게 밝히지 않았고, ‘임신중단에 대한 의견 또한 마찬가지였다. 꾸밈이나 친절함을 강요받아 본 적이 없고 자궁이 없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나는 지금의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미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이는 성차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항하는 것을 탈코르셋이라고 부른다면, 탈코르셋은 필요한 일이 맞는 것 같다.” 정도로만 이야기했다. 사실 이는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나는 이 이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은 이유는 대체로 내가 알지 못하는 범위까지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왜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왜 그러한 방식으로 운동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내부의 어떤 논의가 오가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나의 부족한 판단을 전시할 때였다. 물론 부족한 판단이어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판단이든 세상에 내놓을 때는 그것이 비판받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내 의견이 비판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힘들었지만, 맥락을 이해하게 되고, 내가 어느 정도 선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남자면 닥쳐라는 말에 화나지 않는다.

 

[“너가 페미니스트라고? 너가???”]

    그러다 나는 한 페미니스트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모임은 생각보다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참여할 수 있다. 물론, 그 안에서 내가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열심히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남성이 더 많은 이 특이한 모임의 첫 프로젝트는 각자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계기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각자 자신의 일상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분석하며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다들 그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나의 반성, 고백은 언제나 외부자이기에 가능한 이야기가 많았다. ‘남페미는 참으로 난감한 위치다. 남초 집단에서 이탈했지만 여초 집단에 끼기에는 어색해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아마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전의 연희관 015B의 어떤 기고글에서 페미니스트 앨라이들의 연대, 남페미들의 연대를 요청한 것일지 모른다.[각주:5] 홀로 지속 가능한 운동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내부고발자의 경우 적극적으로 추방된다. 누구도 내부고발자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내부고발자들끼리 모여야 한다. 그렇기에 내부고발자로서의 남페미들은 뭉쳐야 한다. 뭉쳐야 사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점점 끈끈해진 것 같다. 모두 남성 집단에서 이탈하는 외로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집단의 문화에 문제의식을 가져도 평생 있던 공동체를 떠나는 건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힘이 되었고, 각자 자신이 남성 집단에서 겪은 일들을 너무나 뒤늦게 알게 된 관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다를 떼어야 한다고 하는 문화를, 누군가는 남톡방 문화를, 누군가는 술자리에서의 음담패설을 기억 속에서 발굴해 냈고, 폭력인 줄 몰랐던 일들이 폭력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일상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 과거의 언행을 돌아보며 많이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은 자주 우리를 방해하는 이들에게 이용되었다.

       “~ 했잖아. 근데 페미니즘 한다고? 가식적인 새끼.” 이런 말은 으레 접했거나, 접할 것이라 예상된다. 내가 함께하는 이들은 대부분 페미니즘에 대해 일찍 인지한 경우가 15년 메갈리아의 등장이 계기였고, 대부분은 나처럼 강남역 사건 이후였다. 그러니 페미니즘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차별적인 자신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사는 동안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을 것이다. 이는 잘못이 맞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고, 그렇다고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반성을 한다고 해서 잘못이 사라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잘못을 더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저 말에 대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저 말이 담고 있는 의도를 보고자 한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이는 불안, 불신, 공포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남성 집단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면, 이는 단지 남페미못 믿을 놈으로 만들어서 여성들로부터도 이탈시키려는 의도다. 그러니 남성 집단의 다른 이들에게는 일종의 본보기가 된다. , 남성이 저런 말을 할 경우 이는 간단히 다음의 문장으로 바꿀 수 있다. “함부로 페미 같은 거 했다가는 저 꼴 난다?” 따라서 이는 남성 문화에 대한 성찰이나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남성 문화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그런다고 여자들이 봐 줄 것 같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나를 위해 페미니즘을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워마드, 미러링 외에도 페미니즘에는 정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문화와 개인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맞고,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게이라고 의심받고, ‘귀엽게 생겼다며 남성 집단 내부에서 성적 대상화된 경험이 있는 나에게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줬다. 남성인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해 준 게 페미니즘인데, 그게 어떻게 남성혐오사상일 수 있겠는가?

    나는 나를 위해 페미니즘 공부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덜 상처가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한다. 페미니즘은 내가 남성 집단에서 받은 상처들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학문이고 운동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에게 그런다고 여자들이 봐 줄 것 같냐는 물음은 타격이 없다.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아닌가? 나는 단지 성별이나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있는 그대로 긍정되고 싶어서 페미니즘 운동에 조금씩이나마 참여하려 노력할 뿐이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다양하지만, 나는 페미니스트가 고정적인 의미에서의 정체성보다는 계속 기존의 가부장제 영토로부터 떠나는 탈영토화로서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2016)에서 내린 페미니스트란 스스로의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려 하는 이라는 정의와도 상통한다. 그리고 보다 넓은 연대를 위해, “남자가 무슨 페미니스트야?”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어?”라는 수많은 비판과 의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의 중에서 유독 나에게 와닿은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와 함께 대화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페미니스트란 성차별주의적 구조들을 우선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여타의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이들의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그 성차별적 가치와 제도에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인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관한 것이며페미니스트란 생물학적 표지가 아닌 정치적 표지이다…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페미니스트가 되어가야만 한다.’ 페미니즘은 자신의 생물학적 본질성에 근거해서또는 여성들을 위하여라는 시혜적 의미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향한 고질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이 사라져 더는 페미니스트라는 언어가 필요 없을 때까지생물학적 성에 상관없이 더욱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가야만 한다.”[각주:6]



기고 휘파람

  1.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이매진, 2008), 강준만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인물과사상사, 2018) 등의 도서들에 정리가 충분히 되어 있다. [본문으로]
  2. 간단히 말하면, 객체화는 주체성의 박탈을 의미한다. 주체성을 박탈하는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객체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전기가오리, 2016)에 객체화의 종류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 있다. [본문으로]
  3. 여성들에게 자꾸만 무엇을 더 설명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남성들의 행태를 꼬집기 위해 등장한 말이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4. “낄 때 끼고, 빠져야 할 때 빠져라.”의 줄임말. [본문으로]
  5. 성필, 「‘페미니스트 앨라이’의 역설, 소외와 시혜의 함정: 연대를 통해 역할갈등 극복하기」,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자치도서관 교지 편집위원회, 《연희관 015B》, 2016년 가을호(통권 5호), 57~59쪽 [본문으로]
  6. 강남순, 『정의를 위하여: 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적 성찰』, 동녘, 2016, 95~97쪽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