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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展] 단톡밭의 한남꾼 - 20대 ‘한국 남성’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 문화와 남성 집단에 대한 분석을 빙자한 풍자와 조롱
연희관공일오비 2019. 3. 28. 11:050
나는 한남이다. 그것도 평범한 한남이 아닌 ‘특급’ 한남이다. 난 소위 TK라 통칭하는 대구/경북, 그중에서도 경상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19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남중/남고 코스도 수료했다. 남고가 붙어 있던 중학교는 1개의 반에 40명씩, 학년 당 총 11개 학급으로 이뤄진 큰 규모의 학교였다. 점심시간마다 남자들이 개떼처럼 새까맣게 뛰어다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6년이라는 기간 동안 나는 한남들과만 관계를 맺었고 한남들끼리만 생활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뛰어난 한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의 한남스러움을 피력하는데 활용된 위 경험들이 지역이나 출신, 학력 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적과는 별개로 내 삶의 궤적을 한남이라는 단어로 의미 짓는 데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분노와 답답함, 짜증과 싸우고 있다. 2018년 한 해 동안 학내외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 감정과 감각에 기름을 들이부어 활활 타오르게 했기 때문일까. 그 시간을 겪으며 한남들끼리의 남성 연대(R탕 연대라고 쓰고 싶었던 걸 겨우 참았다.)를 최대한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들추고 싶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다. 그들을 비꼬는 동시에 그들과 관계를 맺는 ‘한남이 아닌 이’들에게 한남에 대한 준거가 될 자료를 제공하고 싶었다.
최근 20대 남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특이하고 다른, 그래서 주목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심증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 남성’을 주제로 한 단행본들도 여럿 출판되었다. <한국, 남자> 1라는 적나라한 제목의 책이 출판되어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에 비치된 후 2019년 1월 2일 현재 1월 21일 반납 예정이며, 6명의 추가 예약자가 있다는 사실도 단적인 사례일 수 있다. 2 하지만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그 책들에서 시도한 것과 같은 진중하고 고상한 작업이 아니다. 이 글이 도달하려는 종착점은 풍자라는 분명한 목적과 조롱이라는 확고한 방향성으로 ‘한남’의 껍데기를 까뒤집는 것이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외로운 톰 행크스가 배구공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그려놓고 훌륭한 딕션으로 “윌슨!!!!”을 외치는, 식상한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부하지만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일반적인 예로 국가, 지역 공동체, 가족 등이 있다. 친구나 또래 집단도 그에 못지않은 큰 영향력을 지닌다. 내부의 친밀성이 높고 관계 맺음의 빈도가 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회학습이론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최소한 정당화할 때 그 행위를 모방하고 강화하면서 법 위반에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태도를 학습하게 된다. 이때 강화나 처벌의 주요 준거집단은 가족과 또래 친구 집단이 된다.” 3라고 설명한 것도 그 영향력에 주목한 것이다. 또한 정지원과 강정한이 3명에서 10명 정도의 친밀한 친구집단이 지지 및 보호 기능을 가장 높게 가지며, 10명 이상의 ‘매우 친한’ 집단은 패거리적 속성을 띄게 돼 비행성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 것도 그 영향력을 짚은 것이라 할 수 있다 4.
1
당연히 한남도 한 명, 한 명으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한남 집단, 그중에서도 20대 한남 집단은 그 자체가 한남 전시장이자, 그 특성을 강화/재생산하는 공장이다. 20대 남성들의 또래문화, 남성 집단의 현주소를 들추기 위해 한남 집단에 속해있던 나 자신의 경험, 그중에서도 카카오톡과 관련된 경험을 이 글의 주된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2019년 현재 흔히 ‘단톡방’이라 불리는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이하 단톡방)의 폐쇄성, 보안성은 점점 강화되고 있다. 또한 매년 단톡방 내의 폭력과 범죄가 끊이지 않고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다.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기 힘든 친구들과 카톡으로는 매시간 이모티콘을 날리고 사진, 동영상을 공유한다. 손가락을 놀려 날려 보내는 데이터 몇 조각이 더 중요한 관계의 축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한남 단톡방은 온갖 비밀과 진실, 거짓이 뒤섞인 비틀린 공론장이자 관계의 소용돌이로 작동한다. 여러 군상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의 방으로서 그곳은 누군가는 배제되고 누군가는 응원받는, 누군가는 괴물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병신’과 ‘썅년’이 되는 쓰레기통이다. 그들은 스스로 배수구 혹은 쓰레기통이라 자조하는 토굴과 같은 단톡방에서 도대체 왜 그런 모습으로 꿈틀대는가? 그나마 조신한 척이라도 하는 오프라인에서의 그들과 달리 그곳에서의 그들은 왜 그런 발화를 쏟아내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1)
인간은 누구나 누군가의 새끼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겪지 않은 채 태어난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시험관 아기 등으로 불리는 여러 방법도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쉽게 말해 전부 모친, 부친이 있다는 얘기다. 한남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뭔 놈의 ‘새끼’가 그렇게 많은지, 한남 단톡방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새끼가 득실댄다. 절대 그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대화하는 걸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는데 그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욕, 그것도 그냥 욕이 아닌 ㅆ(쌍시옷)이 들어간 쌍욕의 활용은 한남의 필수적인 자질이다. 풍자와 해학, 한민족의 한을 닮은 구수한 욕이 아닌 철저하게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조롱하기 위한 욕. 한남 단톡방에서 욕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고, 욕을 섞지 않고 진행되는 대화는 그 맛과 효과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용자가 얼마나 그 욕설을 자연스럽고 찰지게 쓰는지는 한남 단톡방 구성원에 대한 평가에 아주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된다. 아 물론 “존나, 씨발새끼들, 병신 같은 게”라며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왈왈 소리를 접하는 내 기분은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다.
한남 단톡방에서 욕설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에는 강한 친밀성을 증명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깔려있다. 이 단톡방이 얼마나 스스럼없는지, 이만큼의 욕설을 서로에게 내뱉고도 얼마나 마음이 상하지 않는지, 재미를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성역과 금기를 깰 수 있는지는 은밀한 공동체의 ‘퀄-리티’를 치켜세우기 위한 그들만의 기준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얼마나 마구잡이일 수 있는지에 근거해 그 단톡방의 가치, 나아가 자신들의 가치를 매긴다.
2)
욕설과 가오가 한남 단톡방의 초기 설정값이라면, 프로그램의 메인 내용은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와 강간문화다. 그들을 여성혐오적이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혐오라는 단어로 한데 그러모아 설명하기에는 그들의 쓰레기 같은 발화는 좀 더 적확하게 그려질 필요가 있다.
한남 단톡방 구성원은 이처럼 얼마나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고, 강간문화를 아무런 불편 없이 자유자재로 향유할 수 있는가로 평가받는다. 한남 단톡방에서의 여성은 인격과 존엄이 삭제된 채 오로지 성기로 환원되어 대상화된다. 한남 단톡방에서의 여성은 한남 자신의 성적 욕망과 남성성을 충족시킬 대상일 뿐이다. 그곳에서의 여성은 오나홀과 다르지 않다. 여성은 끊임없이 얼굴, 몸매, 분위기, 학벌 등 세분화된 기준으로 품평, 조롱, 조리돌림 당한다. 그것이 성폭력이자 여성혐오라는 명백한 지적은 그들에게 어떤 자극과 불편함도 주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질 뿐이다.
서울의 한 유명한 남자 고등학교에서 선배‘님’들이 졸업 예정자들을 모아 룸살롱 등에서 성구매를 하게 지원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만큼 가부장제 사회의 강간문화는 강력하다. 선배들이 대입을 치르고 난 후배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와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 얼마나 가증스러우면서도 놀라운가. 강간문화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여성은 페티시즘 8적 기호로만 존재한다. 한남들은 풀발기 한 채로 수많은 기호를 소환해 폭력의 칼자루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호모소셜 9의 철옹성을 쌓는다.
홈런 10을 얼마나 자주 치는지, 자신의 여자친구가 얼마나 몸매가 좋고 섹스를 잘 ‘허락’ 하는지 등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능력, 자원을 전시, 공유하는 것도 한남 단톡방의 주요한 모습이다. 한남들 사이의 전투에 승리해 여성이라는 전리품을 획득한 한남들은 그 전리품을 경쟁적으로 과시한다. 과시하지 못해 부들부들 안달 낸다.
스스로가 섹스를 얼마나 잘하는지 과시하고 비교하는 장면은 한남 단톡방의 강간문화를 드러내는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섹스를 잘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왕관이자 훈장이다. 그들은 테크닉이 얼마나 좋은지, 상대방을 얼마나 만족시키는지에 대한 자기 환상에 사로잡혀있다. 남성기의 크기와 길이, 강직도, 발기가 유지되는 시간 등에 대해 끊임없이 쏟아내는 발화는 그들의 강간문화를 더욱 또렷하게 그려낸다. ‘6.9cm, 3분 카레’ 등의 조롱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반추해본다면 그 장면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미지의 동물 종이 같은 행동을 수없이 반복한다면, 그 행동으로 그 동물을 명명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섹무새’라는 종이 그렇다.
그들이 왜 모든 말의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섹스!!! 쎅쑤!!!!!! SEX. 섹. sex” 라고 외치는지는 많은 동물학자, 그중에서도 영장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요 연구 관심사로 알려져 있다. 11 모두가 알다시피 여기서 ‘섹스’는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성별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섹스가 아니다. 성기의 결합(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삽입’)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헤테로섹슈얼 남성 시각에서의 성행위를 뜻한다. 그들의 표현대로 ‘박고 쑤시는’ 그것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섹스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발정 난 개 마냥 왈왈 짖어댄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한다.
섹무새는 자신들이 이토록 섹스라고 지껄여대는 이유를 철저하게 합리화한다. 섹무새라는 종이 섹스를 외치는 이유는 분명하며 그 외침은 모두 정당하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인 남성은 언제나 성욕으로 들끓고 섹스(라고 쓰고 강간 혹은 성폭행이라 읽을 여지가 다분한)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당연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것을 넘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남자라면 당연히 이성적인 대뇌의 판단보다는 정액이 얼마나 오래 배출되지 않았는지, 얼마나 섹시하고 꼴릴만한 여성이 거리를 돌아다니는지에 의해 자신의 언행을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남자는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 항시 박을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또 항시 “섹스!”를 외칠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진정한 남자가 된다.
4)
‘우리는 그 정도 사이야!’라는 말은 일견 평범하지만, 한남 단톡방이 원활히 굴러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서 가장 먼저 언급한 욕설의 빈번하고 의도적인 사용도 그에 대한 단적인 예다. 거기에 더해 아래와 같은 발화들에서 읽을 수 있는 ‘호모포비아’는 한남 단톡방의 윤활제로 쓰인다. 한남 단톡방의 구성원들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이라는 점을 전제로 동성애자 남성을 비하하고 멸시한다. 그 비하와 멸시는 그들 내부에 동성애자 남성이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전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실제로 한남들은 자신들 집단에 동성애자가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정도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후장이니, 따먹겠다느니, 비누라느니’ 하는 발화들에서 한남 단톡방의 구성원들이 자신들 사에 ‘호모 새끼’가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적 주체, 달리 말해 삽입을 할 수 있는 이로 존재하고 삽입을 당하는 사람인 여성, 또는 동성애자 남성은 남성성을 가지지 못한 성적 객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성적 주체로서의 남성성을 훼손당할 것이라는 위협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성적 주체로서의 남성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남성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다는 의미이며, 더는 이 단톡방에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
연세대학교 남톡방 성희롱 사건 관련 자보에 붙은 포스트잇 12
앞서 무례하고 거칠게 던져진 사례들이 너무 적나라할 수도 있다. 이 사례들은 대부분 나와 주변 친구들의 경험을 되살려 재구성한 것이다. 내 경험을 되돌아보고 타인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며 한남 단톡방을 살피는 동안 그 공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간절해졌다. 호모소셜은 앞서 간단히 설명한 것처럼 남성 간 성애를 의미하는 호모 섹슈얼과는 구분되는 남성 간 유대 13로서 성적 주체와 성적 객체, 삽입하는 존재와 삽입 당하는 존재 사이의 구분을 매우 강한 속성으로 가진다. 일본의 사회학자 사쿠타 게이치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개념을 동일화와 욕구충당, 다시 말해 ‘되고 싶은 욕망’과 ‘가지고 싶은 욕망’이라는 언어로 설명한 바 있다.” 14 성장 과정을 거치며 아이가 모와 부 중 누구를 동일시하고 누구를 가지려 욕구하는지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된다는 사유는 한남 단톡방이 스스로 남성이 되기 위해 혹은 남성임을 입증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또한 남성기의 삽입으로 주체와 객체의 개념을 짚은 푸코의 논의 또한 주목할만하다. “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성화되는 것feminize 이다.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화되는 것, 즉 성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성적 객체라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15이다. 앞서 네 가지로 구분해 들여다본 한남 단톡방의 거의 모든 모습에서 그 두려움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특정한 알맹이를 포장지와 함께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포장지는 알맹이가 원활히 작동하고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한남 단톡방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마구 비하한다. 나아가 자신들을 쓰레기, 병신 등의 단어로 표현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않는다. 그 과정은 그들의 발화나 행동이 미치는 부정적 결과와 폭력의 무게를 흐릿하게 만든다. 자신들은 ‘애초에 글러 먹은 놈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한탄과 푸념으로 질척이는 발화는 그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는데 근거로 활용된다. 동시에 외부에서 그들을 향해 가해지는 여러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기제로 작동한다.
한남 단톡방의 폐쇄성이라는 껍데기도 흥미롭다. 그 폐쇄성은 그들이 자신들 발화의 의미를 희석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활용된다. 오프라인이나 공개된 온라인 공간이 아닌 자기들끼리만의 공간에서 뱉어지는 발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몇 년째 끊어지지 않는 대학가의 단톡방 성폭력 사건을 옹호하거나 두둔하는 이들의 논리도 대부분 그 폐쇄성에 근거한다. 하지만 당사자가 듣지 못한다고 그 발화가 폭력이 아니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철저하게 은폐된 채 비겁하고 비열하게 강화하는 강간문화와 성적 대상화는 그것의 폐쇄성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위험하고 무섭다. 자신의 친구가 어디서 어떤 말을 씨불이는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캠퍼스와 직장에서 누가 자신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지 불안해 해야 하는 현실은 여성과 소수자들의 삶을 더욱 교묘하게 망가뜨린다.
단톡방 내의 잘못된 문화와 발화에 대한 지적에 오히려 분노하고 억울함을 피력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 20대 남성에 대한 주요한 분석으로 제시되는 자신들을 약자로 설정하는 모습, 군대나 역차별 등의 단어를 열정적으로 외쳐대는 모습 등에 관한 논의도 그 분노와 억울함 등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여성들이 자신들을 얼마나 억압하는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 준비가 되어있다. 나아가 현실의 팍팍함과 과도한 경쟁 등을 이유로 들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정의나 올바름 같은 가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늘어놓는다. 범죄가 아닌 이상, 혹은 들키지 않는 이상 양심의 가책이나 정의 같은 것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카톡으로 몇 마디 ‘농담’을 나누는 일 따위 정말로 별일도 아닌 것이다. 그 카톡 몇 조각이 남을 할퀴고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발톱의 때도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채 자기 자신을 괴물로 만든다.
3
필자도 똑같은 한남이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나를 한남이라 불러야 한다. 그것이 이 글을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물론 비남성 집단이 한국의 남성들을 한남이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도 있다. 과거 여성들이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으로 찢어졌듯이 남성들도 쪼개고 분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하지만 그 집단의 구성원이자 당사자로서의 나는 나를 그렇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이 어떤 의미와 위치를 지니고 있는지 인정하고 면밀하게 살피지 않은 채, 다시 말해 자기비판을 선행하지 않은 채 외부로 사유를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을 한남이라 부르는 것이 앞서 언급한 것 같은 한남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해왔다는 아주 작은 증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토록 작은 증명에는 분명한 대가가 뒤따른다. 아직 페미니즘이나 올바름의 힘은 미약하며 그와 상관없는 사람과 장소는 넘쳐난다. 그러니 자신을 한남이라 부르고, 페미니즘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개인은 대부분의 한남 연대로부터 배제, 탈락된다. 씹선비 16스럽고, 버팔로 17스러운 개소리를 지껄이는 찌질한 ‘새끼’랑 놀아줄 만큼 아량이 넓거나 올바른 한남 연대는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남들은 개인의 성격, 중고등학교 시절의 특별한 사건, 공부나 관계를 통한 결심 등을 이유로 ‘유난스러운’ 존재가 된다. 한남 연대로부터의 배제와 멸시, 조롱과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같은 유난스러운 경험을 하지 않은 한남들에게 한국은 ‘아직도 성평등하거나, 역차별 때문에 여자들만 살기 좋은,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따위로 놀아도 되는, ’농담인데 그 정도는 뭐 어때‘라고 지껄여도 되는’ 공간일 뿐이다.
자신들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남성이며 소소하게 모여 떠드는 단톡방 정도가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툴툴대는 ‘유난스럽지 않은’ 이들이 있다. 자신들의 권력과 위치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이들이 있다. 한남들끼리 단톡방에서 어떤 ‘농담’을 하더라도 양심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 그런 이들이 ‘멀쩡’하기란 불가능하다. ‘나나 내가 있는 단톡방은 안 그래’라고 변명하는 이들은 멀쩡하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원리와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한남들은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라며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안간힘 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자신들의 경험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 순간 그 경험이 유난스럽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유난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
한남을 주변에 둔 이들은 묻고 질문하자. 친구이거나 가족이거나 동료인 한남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있는지 묻고 뜯어보아야 한다. 유난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한남에게 조언과 비판을 던지는 것도 좋다. 하지만 너무 붙잡을 필요는 없다. 에너지 낭비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니 차라리 이 글을 읽게 하라. 부족한 글이지만 이 글이 한남들을 자극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남을 순순히 받아주던 이들에게 유용한 기준과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폭력을 저지르고도 몰랐던,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던 나는 내가 부끄럽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에 마비되어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글 편집위원 재찬(paperlifer@naver.com)
- 최태섭, 「한국, 남자」, 은행나무, 2018. [본문으로]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2019.01.02 https://library.yonsei.ac.kr/ (검색 일자: 2019.01.02.) [본문으로]
- Akers, Ronald L., Krohn, Marvin D., Lanza-Kaduce, Lonn and Radosevich, Marcia. “Social Learning and Deviant Behavior: A Specific Test of a General Theor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44(4), (1979): 636-655. 정지원, 강정한, “친밀한 친구집단의 크기와 청소년 비행”, (2012): 180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정지원, 강정한, “친밀한 친구집단의 크기와 청소년 비행” 한국사회학 제 46집 5호, (2012): 203-204. [본문으로]
- 「이번엔 연세대서…또 터진 '단톡방 성희롱' 내용 보니」 갈무리, JTBC뉴스, 2016. 09. 02. (https://www.youtube.com/watch?v=9dBa8j4anJo) [본문으로]
- 존나라는 욕설이. 남성기를 지칭하는 좃(좆,좃) 등에서 파생된 것이란 걸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본문으로]
-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파생된 용어. 기준을 의미하는 ‘상/중/하’와 평타의 ‘타’, 수치의 ‘치’가 결합하여 상타치, ㅅㅌㅊ 등의 단어로 사용된다. 주로 타인(여성)의 외모, 학벌 등의 자원을 평가하는 데 쓰인다. [본문으로]
- 남성은 주체로서의 여성이 아닌 철저하게 기호화된 여성을 욕망하고 소비한다. 미니스커트, 가는 몸, 큰 유방 등 여성은 철저하게 기호화되어 대상화된다.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0. [본문으로]
- 브 세지윅이
에서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라 설명한 단어. 한국에서는 ‘동성사회적’이란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위와 같은 책. [본문으로] - 소개팅이나 헌팅, 술집에서의 만남 등을 통해 성기 결합에 ‘성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은어. [본문으로]
- 영장류를 연구하는 동물학자분들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으로]
- 연세두리 15호-2016년 11월, 「[스포트라이트]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남긴 과제」 https://yonseiduri.tistory.com/194 (검색일자: 2019.02.27) [본문으로]
-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0, p30-35. [본문으로]
- 위와 같은 책, p32. [본문으로]
- 위와 같은 책, p35. [본문으로]
- 씨발 등에서 파생된 ‘씹’과 ‘선비’라는 단어를 합쳐 재미없고 매사 진지하기만 하다는 의미의 조롱으로 사용되는 단어. [본문으로]
- 여성기를 뜻하는 은어인 ‘보지’와 ‘빨다’, 사람을 의미하는 ‘er/러’를 합쳐 여성을 추종하거나 맹목적으로 여성의 편을 드는 사람을 칭하는 보빨러라는 단어로 사용된다. 이후 주로 버팔로로 희화화되어 사용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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