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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펼쳤다. 대상작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데 유독 결이 튀는 글이 있었다. 김봉곤 작가의 「그런 생활」이었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의 삶에 실존하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그들의 언행과 감정 묘사는 내밀함을 넘어 극도로 ‘현실적’이었다. 소설에 등장한 한 인물이 화자를 “봉곤아”라고 부르고 나서야 나는 책을 덮고 포털사이트에 ‘김봉곤’을 검색했다. 곧 김봉곤의 글쓰기가 대부분 오토픽션(Auto-Fiction)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그런 생활」 역시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오토픽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토픽션과의 첫 조우였다.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어원의 ‘auto’와 허구를 뜻하는 ‘fiction’을 조합한 단어인 오토픽션은 문학과 현실을 합치하려는 형태의 글쓰기 방식이다. 일반적인 문학과 달리, 오토픽션은 되려 ‘문학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환상, 상상과 같은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고자 한다. 따라서 오토픽션에는 한 가지 지켜야 할 규약이 존재한다. 글의 저자, 서술자, 주인공이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토픽션 속 작가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과 경험을 화자의 입을 빌려 소설 안에 녹여낸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부터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작가의 삶이 적극적으로 묘사된 문학작품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토픽션이라는 창작방법론이자 문학 형태의 덕택이었다.
2018년을 기점으로 문학작품의 주요 흐름 중 하나는 퀴어 서사였다. 동성애가 등장한 문학 작품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퀴어 소설이 주류 문학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꽤 최근이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따라서 동성애자의 존재를 함구하며 쉬쉬하는 대한민국에서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 1, 최은영의 「그 여름」 2,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3 등의 작품들은 그저 언급 정도에 그치던 퀴어의 성애적 관계를 작품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단 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김봉곤 등의 작가들은 글 속에 자신의 성소수자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녹여냄으로써 퀴어인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후 젠더 이슈, 퀴어 이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문학은 ‘당사자 문학’의 이름표를 달 수 있었다. 오토픽션이라는 창작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들은 동성애자인 ‘나’와 ‘나’를 둘러싼 이들을 문학에 등장시킴으로써 당사자 문학을 창작하는 주류 작가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을 읽을 당시의 심정을 기억한다. 차분히 「그런 생활」을 독해하던 그때의 기억은 묘하게 낯설었는데, 그러한 감각은 오토픽션이라는 글의 형태에 대한 낯섦 때문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이 글 속 등장하는 장치들이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가를 나름대로 가늠하려는 나의 소극적인 시도에서 기인하기도 했다. CCTV로 누군가의 삶을 빼곡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현실적인’ 서사를 읽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고개를 디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이 은연중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이내, 문학동네라는 거대 출판사가 수여하는 상을 받고 이렇게 정식 출판된 글이니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정당했을 것이라는 자기 위안과 함께 나의 의구심과 불안감을 억눌렀다.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된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이 때때로 혐오적이고 불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런 생활」이 지닌 ‘퀴어 당사자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되뇌었다. 그러나 얼마 후,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정당했을 것’이라던 나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도, 정당하지도 않았다.
지난 7월, “저는 김봉곤 作 「그런 생활」의 C누나입니다.”로 시작하는 입장문이 트위터에 게시되었다. 4 트위터 이용자 ‘다이섹슈얼’은 이 입장문에서 자신이 김봉곤과 주고받은 사적인 카카오톡 대화가 그의 2020 젊은 작가상 수상작인 「그런 생활」에 여과 없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설 속 등장하는 ‘C누나’라는 가명의 C가 자신의 실명 이니셜이고 김봉곤과 자신을 함께 아는 지인들은 모두 이 인물이 자신임을 알고 있다고 토로했다.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적 대화를 가감 없이 사용한 데에 김봉곤에게 수정을 요구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고 제출되어 『문학과사회』(2019년 여름호)에 발표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봉곤은 이 작품으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다이섹슈얼’은 문학동네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젊은작가상 수상 취소를 요청했지만 그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무리한 것인 것 마냥 그를 응대한 문단과 김봉곤의 대응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었다고 말했다. ‘다이섹슈얼’의 고발은 문단 내외 많은 파동을 그려냈고 이후 하루 뒤인 7월 11일, 김봉곤은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입장문을 게시했다. 5 또한,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자 16일, 더 긴 형태의 입장문을 같은 계정을 통해 올렸다. 6
“확실하게 ‘동의’를 표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입장문은 혼란스럽다. 11일 게재된, “‘다이섹슈얼’님의 문제 제기에 답변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첫 입장문은 ‘다이섹슈얼’에게 사과 의향을 밝히고 잠시 짧은 사과를 나열한 후, 하지만 자신의 소설이 ‘다이섹슈얼’의 주장과는 달리 정당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다이섹슈얼’은 작품이 게재되기 전과 『문학과사회』(2019년 여름호)에 처음 발표되었던 시점에 원고를 공유받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카카오톡 대화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작품이 담긴 김봉곤의 단행본인 『시절과 기분』이 출간되고 나서야 ‘다이섹슈얼’은 특정 대사에 대한 수정을 요구했고 자신은 즉각, 여러 번에 걸쳐 사과했으며 수정 요구에 충실히 임했다고 말한다.
이후 논란이 더해지자 그는 이미 게시한 11일의 입장문을 보충하기 위해 ‘다이섹슈얼’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인용하여 16일, 새로운 입장문을 공개한다. 그에 따르면, 김봉곤은 「그런 생활」을 집필하기 전, 카카오톡 대화를 소설에 인용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구했고 ‘다이섹슈얼’은 “맘대로 써라”고 말하며 이에 동의했다. 이후 원고 전문을 읽은 ‘다이섹슈얼’의 “내 아픔을 가져다가 후지게 썼”지만 “니 마음에 들면 됐다”는 발언 역시 자신에게는 동의의 의미로 읽혔다는 것이다.
김봉곤에게는 이같이 사적 대화를 소설에 인용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던 ‘다이섹슈얼’이 돌연 수정을 요구하고, 자신의 젊은 작가상 수상을 부정하는 것이 곤혹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는 ‘다이섹슈얼’의 문제 제기 이후에야 ‘다이섹슈얼’이 “확실하게 ‘동의’를 표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소설화에 대한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는 점을 반성하고 ‘다이섹슈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확실한 동의. 어떤 지점까지가 확실한 동의이고, 어디부터는 불확실한 동의인가? 무언가를 외치고 부르짖어야 확실한 동의이고, 조용히 읊조리거나 속삭이는 것은 불확실한 동의인가? 확실과 불확실 간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맘대로 써라”고 말했던 ‘다이섹슈얼’의 발언은 확실하건, 확실하지 않건 언뜻 동의처럼 비춰진다. 그는 “맘대로 써라”고 말했던 ‘다이섹슈얼’의 동의가, 실은 불확실한 동의였음을 깨달았다며 반성하지만 이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김봉곤이 가늠해야 할 것은 ‘다이섹슈얼’이 원고 집필 전, 혹은 초고를 읽은 후 얼마나 확실히 동의했는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이섹슈얼’은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 발간 이후, 본인이 ‘C누나’ 아니냐는 의혹을 모두 감내해야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려낸다고 선언한 김봉곤의 작품 속 등장하는, 세세하고 내밀하게 자신의 사생활을 고백하는 ‘C누나’는 ‘다이섹슈얼’일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이섹슈얼’의 지인들이 다가와 그가 김봉곤의 글 속 ‘C누나’가 맞는가를 물은 이후의 ‘다이섹슈얼’의 심경 변화와 김봉곤의 집필 과정에서의 동의 여부는 독립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 단계에서의 ‘다이섹슈얼’의 동의는 단순히 글의 원료가 되는 것에 동의했을 뿐, 타인들의 ‘혹시’로 시작하는 물음, 그리고 차마 묻지 못하고 쉬쉬되는 상상과 의혹들을 감내하겠다는 데에 동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설 작성 이전의 “맘대로 써라”와 초고 공유 이후 “니 마음에 들면 됐다”에 매몰되어 ‘동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김봉곤의 논점 이탈에 해당한다. 김봉곤은 “미숙하고 불충분한 소통이었으나 동의를 얻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행여 발생할 수 있는 불편에 대해서도 최대한 헤아려 조치를 취하고자 했”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조치는 사전이 아닌 수정 요청 사후에 이루어졌어야 한다.
사전에 동의가 있었는지, 그 동의가 어느 정도 확실했는지를 진단하고 ‘상대가 동의했으므로 정당했다’고 고함치는 논법은 어딘가 익숙하다. 이는 지금껏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의 현장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사용되었던 사회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법정 최저 임금 이하의 임금을 지급하는 고용주는 생계유지에 급급했던 노동자에게 ‘일하기 전에 고지하지 않았냐’고 성토하며 ‘배은망덕’을 운운한다. 직장 내 상사인 남성은 성폭력으로 고발당할 때마다 그 접촉이 상호 간 동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정당했다는 고루한 주장을 펼친다. 부부간 성폭력을 다루는 사회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작 일 분도 안 되는 혼인 서약에 맹세했다는 이유로 몇십 년의 부부생활 중 발생하는 수 없는 성관계에는 ‘동의했지 않냐’는 꼬리표가 따라붙어 그 폭력의 본질을 흩뜨린다.
그러니 김봉곤이 사전 동의 여부와 그 동의의 확실성을 되짚는 것 역시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 김봉곤과 ‘다이섹슈얼’의 관계 역시 쓰는 자, 쓰이는 자라는 역학 속에서 자연스레 위계를 형성한다. 또한, 김봉곤은 일찍이 등단한 유명 저자이고, ‘다이섹슈얼’은 편집자라는 점에서 그 위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다이섹슈얼이 사전에 동의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 동의의 언어 속 확실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김봉곤의 입장문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다. 위계 속 폭력을 관전하는 지배자의 화법이기 때문이다.
김봉곤이 말하는 객관의 언어들
16일 공개된 김봉곤의 입장문에는 ‘사실관계’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사실관계와 선후 관계를 파악해달라는 요구도 여러 번이다. 그는 오토픽션이 자신의 주된 창작방법론이라고 설명하면서 “제 삶을 질료 삼아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고자” 하는 글쓰기를 이어왔다고 말한다. 또한 “오토픽션 역시 ‘픽션’”임을 고려했을 때 자신이 가공한 세계 속 등장하는 인물과 설정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글 속 등장하는 설정과 인물에 대한 기술과 수정을 ‘책임’이라는 말로 설명했지만 사실 김봉곤은 다름 아닌 자신이 “수많은 장면 중 문학적 렌즈에 포착”된 피사체를 “재조합”하여 맥락을 부여했기에 인물을 기술하고 수정하는 것이 자신만의 ‘권리’임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는 오토픽션의 특성상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포착하여 글에 녹여내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며, 이때 “불미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소설 속 등장인물과 환경들이 모두 허구로 이해되도록 총력을 다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오토픽션이라는 문학적 갈래에 대한 설명, 그에 따른 자신의 노력, 또 ‘다이섹슈얼’과의 소통 과정 등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면서 객관성과 사실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관계와 선후 관계를 파악해달라는 그의 호소는 사건의 사실성에 대한 열쇠를 다름 아닌 자신이 쥐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입장문은 사실로 가득하다. 오토픽션은 그의 설명대로 작가의 현실적 삶과 문학의 허구적 장치를 합치하려는 특성을 보이며, 그는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원료로 하여 글을 쓰되 피치 못하게 등장하는 주변인들에게는 동의를 구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C누나’, 즉 ‘다이섹슈얼’은 글에 등장하는 데에 동의했다. 모두 사실로 이루어진 그의 입장문은 그러나 때때로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가 사생활과 관련된 내밀한 대화가 오고 간 카카오톡 대화를 그대로 작품 속에 ‘복사 후 붙여넣기’한 후, 그 카카오톡 대화의 발화자를 ‘C누나’로 설정한 것을 떠올려 보자. ‘다이섹슈얼’의 이름 이니셜을 그대로 차용하고 성별과 같은 기본 인적사항을 변경하지 않은 채 탄생한 ‘C누나’는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김봉곤은 진정으로 ‘C누나’의 허구성을 바랐던 것일까? 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과 환경들에 허구성을 주입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김봉곤의 주장과 「그런 생활」 속 ‘C누나’, 그리고 김봉곤-‘C누나’ 간 카카오톡 대화는 좀처럼 합치되지 않는다. 그는 오토픽션에 대한 객관적 설명, 그가 창작 과정에서 했던 노력 등을 나열하며 진실성, 사실성을 호소하지만 정작 그의 소설 「그런 생활」은 그러한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주요한 근거가 된다.
자신이 창작한 작품 속의 모든 풍경이 허구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해진 정답은 없겠지만 대부분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소설과 실제의 오버랩은 그저 우연일 뿐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모든 것은 사실 허구였다고 단언한다. 최은미는 자신의 장편 소설 『아홉 번째 파도』 7 속 작가의 말을 통해 “소설 속 정치적 사건은 여러 부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인물들은 모두 허구입니다(가령 S시 보건소의 특정 부서 사람들이 당시에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했는지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 중 실제 인물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개연성 있는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우연”이라고 말한다. 내가 멋대로 돋보기를 가져다 댄 타인의 삶에, 나의 글쓰기로 인한 얼룩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작가로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2020년 9월에 발간되는 김금희의 장편 소설 『복자에게』의 오디오북에서 김금희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인물은 허구이며 특정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는 문장으로 오디오북 전체의 포문을 연다. 8 이처럼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글쓰기의 원료로 활용할 때,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겹쳐지는 순간들이 모두 우연 혹은 착각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허구임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뒤이어, 김봉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법적 자문’을 언급한다. ‘다이섹슈얼’이 자신에게 제기한 ‘명예훼손’과 ‘도용’ 혐의가 법률상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법적 자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인 ‘C누나’의 특정성이 성립되지 않고, ‘다이섹슈얼’의 몇몇 지인들이 ‘특정 문장’을 읽고 ‘C누나’가 ‘다이섹슈얼’임을 알게 되더라도 “그 문장만으로 해당 인물의 명예 손상이 반드시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는 자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카카오톡 대화가 ‘창작물’에 해당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도용 혐의 역시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법은 정의일 테고, 그가 받았다는 법적 자문은 자신의 정의로움을 상징한다. ‘다이섹슈얼’이 김봉곤을 향해 제기한 혐의가 법률상 합당하지 않다는 김봉곤의 말은 그의 글쓰기가 여전히 정의로웠다는 주장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법은 결코 정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법은 그저 해당 사회가 그때마다 창조하는 산출물일 뿐이며 따라서 법률상의 송사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그 송사를 야기한 행동에는 정의나 윤리, 도덕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리어 법이 모든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일 것이라고 믿는 법 만능주의는 개인의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권리를 점점 중심에서 밀려나게 할 수 있다. 9 이처럼 자신의 입장문 속 법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이섹슈얼’이 제기한 송사의 허점을 법의 이름으로 집요하게 찔러대는 그의 글쓰기는 또다시 피해호소인을 심정적 궁지로 몰아넣었다.
자의적으로 피해자의 언어 해석하기, 불필요하게 자기 연민하기
김봉곤의 입장문에는 “자신과의 내밀한 대화가 소설에 드러나 고통받고 있다는 D님(‘다이섹슈얼’)이 어째서 자신에게 통제 불가능한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도록 요구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는 자신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내용 증명을 보낸 ‘다이섹슈얼’에 대한 그의 감상으로, 사적 대화가 인용되어 불쾌감을 느낀다던 ‘다이섹슈얼’이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어색하며 일관되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이 침범당해 고통스러운 이가 그러한 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못 박는 김봉곤의 언어는 분명히 2차 가해로 읽힌다. 자신의 잘못된 글쓰기 방식, 해결 방식에서 기인한 문제 상황을 그저 피해자의 사적인 문제로 치환하고 나아가 사적인 문제는 사적인 차원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이하지만 익숙한 그의 논리는 피해자의 공론화를 방해하고 나아가 피해자가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이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여성학의 주요 논제를 등장하게 한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후 그는 ‘다이섹슈얼’과 자신의 카카오톡 대화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문제 제기에 대한 당혹감을 표출한다. 그는 자신에게 ‘넌 뭘 잃는 것이냐, 무엇이 훼손되는 것이냐’고 묻는 ‘다이섹슈얼’에게서 문제 해결이 아닌 ‘김봉곤이 무언가를 잃는 것’을 바라고 있음을 읽어냈다고 말하며 ‘다이섹슈얼’의 문제 제기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또한, 카카오톡 대화가 인용되어 피해를 경험하고 있는 ‘다이섹슈얼’의 카카오톡을 또다시 인용하여 “얼굴을 가린 음란물은 유포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라는 ‘다이섹슈얼’의 언어를 입장문 속 삽입한다. 이러한 발언이 “겁을 먹”을 만큼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며 이 비유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소설로 야기된 일은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고도 생각했”다고 밝힌다.
그는 피해자의 의도를 추측하고 자신의 처지를 연민한다. ‘다이섹슈얼’이 내용 증명을 통해 공식적으로 요구한 사항은 그의 몰락도, 그의 무언가가 훼손되는 것도, 그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이섹슈얼’이 공식적으로 요구한 사항은 첫째, 「그런 생활」에 인용된 자신과의 카카오톡 대화를 삭제할 것. 둘째, 젊은 작가상을 반납하고 그 이유를 출판사를 통해 고지할 것. 셋째, 해당 수상 작품집에서 해당 단편을 삭제할 것. 그리고 넷째, 「그런 생활」이 실린 김봉곤의 단편집인 『시절과 기분』에서 해당 단편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고 출판사를 통해 고지할 것. 총 네 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사적인 카카오톡 대화를 또다시 인용하여 피해자의 요구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이는 피해자의 말이 피해 호소와 문제 해결 그 이상의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자아내어 피해자의 언어를 흐리는 대표적인 2차 가해이기도 하다. 피해 호소의 진의와 목적을 의심할수록 가해자는 끊임없이 미화되고 연민의 처지가 된다.
“판매 중지하고 상을 반납하겠습니다.”
‘다이섹슈얼’과 김봉곤의 지난한 송사를 예상하던 사람들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7월 17일, 한 트위터 이용자 ‘0’이 자신의 사생활 역시 ‘다이섹슈얼’과 마찬가지로 김봉곤의 글에 그대로 기술되었다는 것이다. 10 그는 그가 김봉곤에게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는 몇몇 단어만 수정된 채로 김봉곤의 데뷔 표제작 「여름, 스피드」 속 도입부가 되었고 출간 이후 여러 차례의 아웃팅을 당했다고 말한다. ‘0’는 이에 대해 문제 제기했지만, 김봉곤의 미온적인, “마치 조별과제 PPT를 수정하는 듯한” 태도에 수정 요구를 중단했다고 말한다.
해당 공론화 트윗이 게시된 4일 후, 김봉곤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사과의 뜻을 전하면서 자신의 단행본을 판매 중지할 것뿐만 아니라 「그런 생활」에 대한 젊은작가상 역시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그의 단행본은 환불 처리가 진행되고 있고 절판되었으며 김봉곤은 더는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 일단락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겠다. 그 이유는 문학동네가 이후 게시한 공지에서 찾을 수 있다. 11
김봉곤 작가가 젊은작가상 반납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이에 관련 사실을 모두 심사위원들에게 알렸고 심사위원들은 젊은작가상 반납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이섹슈얼’의 내용 증명 수신과 공론화 직후, 미온적인 태도로 문제를 해결하던 문학동네는 ‘0’의 등장 이후, 김봉곤이 자신의 단행본 판매 중지와 젊은 작가상 반납에 대한 의사를 전달하고 나서야 돌연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즉, 김봉곤의 젊은작가상 수상 취소는 전적으로 그가 반납 의사를 표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출판사와 젊은작가상 심사위원들은 그저 그의 의사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문학동네는 일찍이 피해자의 존재와 그의 호소, 요구사항 등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그저 삭제 후 재인쇄하여 문제 상황에 대한 고지 없이 판매를 계속했으며 피해자의 젊은작가상 수상 결정 취소 요구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이 해당 부분이 전체 작품을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의견”을 보냈다고 공지했다. 12 문단 안에서 공고한 권력을 지닌 심사위원들의 입을 빌려 김봉곤의 문제적 글쓰기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피해자의 호소를 문제시한 것이다. 해당 단편이 실린 『시절과 기분』의 출판사인 창작과비평 역시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제 부분을 수정하여 중쇄했지만, 문학동네와 마찬가지로 해당 수정 사실을 공지하지 않았다. 이때 해당 사실을 공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피해자의 주장과 김봉곤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두 출판사의 문제 해결 방식은 그저 피상적인 문제 해결에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호소를 의심함으로써 그를 이중으로 가해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출판사의 이러한 태도는 ‘문학이 야기하는 폭력성’에 대한 문단 내 입장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며, 쓰는 자와 쓰이는 대상 간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 속에서 김봉곤이 지닌 ‘쓰는 자의 권력’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으로 인해 발생한 한 개인의 피해 호소는 ‘창작의 자유’ 앞에서 힘을 잃었다. 무기처럼 한 개인을 해치던 작품은 작가의 시인(是認) 이후에야 그 폭력성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문제 해결 절차 속에서 김봉곤은 어쩌면 ‘다이섹슈얼’의 문제 제기 이후에 오히려 더 많은 권력을, 더 공고히 했을지도 모른다.
김봉곤의 수상 취소 요구를 거절하고 그의 글의 문제성을 직시하지 않는 문학동네의 이러한 태도는 ‘김봉곤이 문학동네의 편집자이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샀으며, 나아가 그의 젊은작가상 수상 역시 과연 공정한 것이었냐는 의혹에 둘러싸였다. 젊은작가상 수상과 관련한 공정성 의혹과 관계없이 문학동네, 창비 등의 출판계가 사건 해결에 취한 미온적인 대응은 실망스럽다. 여하를 막론하고 한 개인이 밝히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 출판사의 지면을 통해 노출되었다며 피해를 호소할 때 출판계가 해야 할 일은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문제 된 소설에 수여된 상을 즉각 회수하고 문제 상황을 독자들에게 상세히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상 파악과 피해자와의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출판계는 결국 상을 반납하겠다는 김봉곤의 의사가 도달하고 나서야 사건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수상부터 상에 대한 반납 수렴까지, 철저하게 김봉곤의 의사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결국 김봉곤은 사과도 하고 상도 반납하지 않았느냐’는 결과론을 들이미는 것은 그 실효를 잃는다. 모든 사태의 진정이 수상 취소가 아닌, 수상 반납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서사 편집권’ 긍정하기
김봉곤은 마지막 입장문에서 자신의 작법을 “부주의한 글쓰기”로 호명하며 그로 인해 발생한 폭력과 피해에 대해 사죄한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부주의’에서 찾는 그의 발언은 명쾌하진 않지만, 결코 반박될 수 없다. 그의 글쓰기에서는 고의와 악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이섹슈얼’ 역시 자신의 입장문에서 “김봉곤 작가는 소설가이자 편집자이자 퀴어입니다. 성 인지 감수성과 저작권의 개념을 영감과 도용의 차이를 논의하지 않아도 잘 알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저의 친구였습니다.”라고 말한다. 김봉곤의 글쓰기가 부족한 성 인지 감수성이나 자신에게 품은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부주의한 글쓰기가 야기할 수 있는 폭력을 보았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 그가 지니고 있던 성 인지 감수성에 의해 더해지거나 덜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시절」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자칫 ‘나’에 대한 글쓰기가 필연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오해로 귀결될 수 있다. 김봉곤은 입장문 내내 오토픽션이라는 창작방법론이 지닌 고유의 특성과 자신이 취한 윤리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리 속에서 김봉곤의 주요 작법인 오토픽션, 즉 ‘나’에 대한 글쓰기와 부주의한 글쓰기, 문제적 글쓰기를 연결하는 흐름은 어색하지 않다. 실제로 ‘다이섹슈얼’의 문제 제기 직후 많은 이들은 사생활 침해 혹은 타인 대상화와 같은 문제 상황이 오토픽션의 필연적인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오토픽션의 창작을 지양하자’라는 해답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글쓰기는 절대 폭력성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적 구조를 전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나’, 즉 당사자에 대한 글쓰기였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주인공은 늘 이성애자로, 주인공이 맺고 있는 성애적 관계는 늘 이성애의 것으로 묘사되던 문단 내 이성애 중심주의를 낯설게 보고 이성애가 지닌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퀴어 당사자 문학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나’에 대한 글쓰기와 문제적 글쓰기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나’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은 ‘나’의 존엄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책 『사람, 장소, 환대』 13를 통해 현대 사회의 기본 작동 원리를 여러 층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서사의 편집권”을 언급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별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 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209p)
이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한 사람의 존재 자체, 존엄성을 긍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닌 ‘서사의 편집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라는 문장은 여러모로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김봉곤의 글은 ‘서사의 편집권’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봉곤의 문학이 사랑받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김봉곤은 2016년 등단하여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그의 글이 꾸준한 수요에 의해 창작되어 출판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다름 아닌 ‘나’에 대해 썼기 때문이다. 그는 대부분 글에서 화자이자 주인공이 ‘나’, 즉 김봉곤임을 드러내는 것에 서슴지 않았으며 자신의 주요한 창작 기법이 오토픽션임을 꾸준히 말해왔다. 그의 소설에는 김봉곤이 등장한다. 작가이자, 퀴어 정체성을 가진 김봉곤 말이다. 당사자가 말하는 소수자의 서사는 그 자체로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퀴어 당사자로서 늘 이성애 권력에 의해 곡해되어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그의 글쓰기에서 서술하고 편집할 수 있었다. 그의 문학에서 ‘당사자성’은 그의 소설이 꾸준하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다이섹슈얼’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김봉곤이 오토픽션이라는 창작기법을 필사적으로 변호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김봉곤이 가진 서사의 편집권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자, 그의 문학이 목표로 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가 자신의 서사를 편집할 권리를 쥐여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타인이 가진 서사의 편집권을 부정한다. 김봉곤은 오토픽션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삶을 질료로 사용했다’고 밝히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아주 빈번하게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 역시 질료로 하여 창작을 계속해왔다. 그는 자신의 ‘당사자성’을 토대로 자신이 보고 듣고 쓰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문학적 렌즈’를 거친 것이라고 자만하면서 타인의 삶을 글쓰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타인의 삶을 원료로 글을 창작하면서도 그는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애초에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를 묻기보다 타인의 삶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그의 삶이 어디까지 공개되어도 문제없는지를 물었다. 그의 소설 속 등장하는 ‘C누나’의 카카오톡 메시지와 ‘영우’의 페이스북 메시지는 거짓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편집권을 무시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기술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타인의 삶을 조금씩 떼어와 글을 쓰는 작법 자체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글 속에서 타인의 삶을 그저 원료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창작 과정에서 주의했음에도 문제가 발생했다면 피해자의 호소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타인의 삶에 나의 논리를 들이밀지 말고, 주의 깊게 듣고 쓰고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다.
김봉곤이 야기한 문제의 시발점은 그의 부주의한 작법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대한 것은 피해 호소 이후의 그의 대응이었다. 그는 듣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객관’의 논리를 들이밀었으며 피해자를 자신의 창작 과정 속 방해꾼으로 이해했다. 누군가가 나의 글쓰기로 인해 상처받았다고 토로한다면, 일단 들어보자. 그가 나의 소설에 등장하는 데 동의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그가 이전에 남겼던 언어들을 되짚으면서 그에게 일관된 논리를 고함치지 말자. 그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밀고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범인(犯人)으로 힐난하지 말자. 그것이 생채기 없는 글쓰기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글 편집위원 빙봉(soobinlee@yonsei.ac.kr)
- 김세희, 『항구의 사랑』, 2019, 민음사 [본문으로]
- 김세희, 『항구의 사랑』, 2019, 민음사 [본문으로]
-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2019, 창작과 비평 [본문으로]
- 다이섹슈얼(@kuntakinte1231), “저는 김봉곤 작 「그런 생활」의 C누나입니다…”, 2020.07.10. https://twitter.com/kuntakinte1231/status/1281501681042120709?s=20 (접속일자 2020.09.06.) [본문으로]
- 김봉곤(@bonggon_kim), “소설가 김봉곤입니다. …”, 2020.07.11. https://twitter.com/bonggon_kim/status/1281796260828086272?s=20 (접속일자 2020.09.06.) [본문으로]
- 김봉곤(@bonggon_kim), “소설가 김봉곤입니다. …”, 2020.07.16. https://twitter.com/bonggon_kim/status/1283642517875908608?s=20 (접속일자 2020.09.06.) [본문으로]
- 최은미, 2017, 『아홉 번째 파도』, 문학동네 [본문으로]
- 김금희는 9월 9일 『복자에게』 정식 출간에 앞서 8월 3일부터 『복자에게』 오디오북을 연재했다. 이는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209 에서 들을 수 있다. [본문으로]
- 김종구, 법 만능주의의 함정, <한겨레21>, 1998.09.09.,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0830/1p3q8u01.html (접속일자 2020.08.18.) [본문으로]
- 0(@hairgym), “저는 김봉곤 작가의 데뷔 표제작 「여름, 스피드」의 영우입니다.…“, 2020.07.17. https://twitter.com/hairgym/status/1284026531065393152?s=20 (접속일자 2020.09.06.) [본문으로]
- 문학동네 출판그룹, “『여름, 스피드』와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대한 후속 조치”, 2020.07.21. https://www.munhak.com/bbs/board.php?bo_table=notice&wr_id=179 (접속일자 2020.09.06.) [본문으로]
- 정상민, 「소설가 김봉곤 작품 논란, 출판계 뒷북 대응이 키웠다」, <미디어오늘>, 2020.07.18.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230, (접속 일자 2020.08.11.) [본문으로]
- 김현경, 2015,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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