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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행과 폭력에 대한 발화가 등장합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등장합니다.



경보 문자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진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실질적으로 3단계나 다름없는 2.5단계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선포되었다. 마스크의 습한 이물감 정도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지만, 사람들과의 물리적 단절에는 도통 적응되지를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가장 미워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코로나의 시대가 되면서 추악한 사람들은 여전히 뉴스와 SNS 속에서 적나라하게 마주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통 만나기 힘들어진, 그 강제적인 불균형의 틈에 자주 매몰되었다. 그 와중에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텔레그램 내 성폭력 사건이 덮쳐왔다.


“그 방에 입장한 너흰 모두 살인자다.”


2019년도 11월 말에 한겨레에서 ‘N번방’의 존재를 보도한 이래로, 당장 12월에는 N번방과 유사한 단체 톡방을 고발하는 프로젝트 ‘ReSET’이 구성되었고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SNS 페이지도 개설되었다. 그때까지도 텔레그램 내 성폭력 실태가 대중에게 두루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올 3월, 정확한 사실관계를 떠나 “26만 명”이 이와 같은 텔레그램 성착취에 참여했다는 보도가 나면서 급속도로 이목이 쏠렸다. 코로나 시대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 성명서, 인터넷 총공격을 포함해 다양한 방식으로 텔레그램 내 성폭력 규탄 운동이 이어졌다. 특히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서는 #N번방_가입자전원처벌, #텔레그램_내_성폭력_공론화와 같은 대규모 해시태그 릴레이 운동이 시작되고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 공개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참여했다. 그러다 3월 17일, N번방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박사방’의 운영자 ‘박사’(계정명)가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와치맨’ 등 텔레그램 내 성폭력 핵심 주도자/운영자들이 줄줄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도통 개운하지가 않다. 일베,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버닝썬 게이트. 그리고 그 모두에 대한 미진한 처벌을 목격하면서 더욱 거대한 해일이 닥쳐올 것을 오래도록 예상했지만, 모호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일 뿐이었던 것이 예상보다 거대한 숫자, 혹은 물리적 실체로 구현되었을 때, 그 앞에서 죽음과 같은 무기력에 빠진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누적 확진자 만 명의 소식으로 폰이 울려대는 와중에 N번방 참여자 26만 명의 소식은 어떠한 경고 문자도, 즉각적인 국가적 조치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 침묵 앞에서 살을 에는 공포와 분노 또한 점차 새로운 무기력이 되어 무겁게 쌓여갔다.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이물감, 목구멍에 들러붙은 불만의 파편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가해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조주빈의 이야기만을 하기는 싫었다. 성착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280자로만 담아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어수선한 좌담회를 준비했다. 가해자, 여성-남성 청소년,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 꼭지를 추려내고서 해당 주제와 맞닿아있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 <한공주(2013)>, <서치(2018)>를 보았다. ‘N번방’과 ‘영화’에 대한 좌담을 준비했지만, 영화를 재료 삼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고 말았다. 긴 시간 동안 손정우, 소아성애, 미투, 모성의 이야기들이, 정보와 감정이 뒤얽힌 채 쏟아졌다. 그 충동적인 전환들이 난데없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이 모든 게 지독하게 연결된 문제임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텔레그램 내 성폭력과 직결된 것이 아니더라도 더 깊이 파헤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다소 2020 한국 영페미들의 한풀이 같은 대화를 한 조각 기록한다.



‘26만 명’과 그 이후

빙봉: N번방 특집 기사가 몇 편짜리였는데 기사를 읽는 데엔 5분이 걸렸지만 몇 주 동안 괴로워했어요. 매일 울면서 ‘내가 나약해서 이러나?’ 하고 자책했는데, 그냥 (가해자들이 똑바로) 처벌받으리라는 기대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랑: 맞아요. N번방에 대해서 지난 4개월간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긴 게 거의 없잖아요. 국민 청원에 뭐 몇백만이 참여하고 그랬지만 그 이후론 굉장히 미미하게,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제는 이게 페미니스트가 공유하는 국가적 트라우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피해와 가해를 정의하기도 어려워지는 게, 이제는 뭐 103명의 식별된 피해자만 피해자인 게 아니라 특집 기사를 읽는 여성 모두가 너무 힘들고, 팀 프로젝트로 텔레그램방에 잠입했던 대학생들이나 보도 기사 쓴 기자들도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걸렸다고 하잖아요. 21세기 한국 여성으로서, 우리도 SNS를 매일같이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일상 속에 침투해있는 이 폭력의 상황에 너무 바로 감정 이입이 되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지난 일 년간 너무 많은 여자가 죽었고. 회복될 시간 없이 무언가가 계속 닥쳐오는데 정말 아무것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이제는 ‘26만’이라는 숫자가 눈앞에 놓였는데 이것마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싶은 생각이 너무 압도적으로 덮쳐오는 거죠. 제가 기억하기로, N번방 기사가 포털 메인에 걸린 날, 전 세계 코로나 확진 인구가 28만이었어요. 세계에서 28만 명이 연루되어도 재난이라고 하는데, 국내 N번방 이용자가 26만이라는 거예요. ‘이건 완전 국가적 재앙이다’ 싶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대응은 일상이 되어가는 한편, N번방은 벌써 다들 진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빙봉: 저는 그 26만이라는 숫자에서 남성 소셜을 느꼈던 것 같아요. “26만 명”이 참여했다고 말하면 화내는 사람들 많잖아요, 막 26만 아니라고. 이래서 아니고 저래서 아니고. “나는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고 – 하지만 이건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의 문제다.” 이렇게 얘기하고.


두별: 논점을 흐리는 게 너무 심해요. 왜 굳이 변론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이건 중국 아이디가 있어서 이거고, 정확히 따져보면 텔레그램 내 성폭력 참여 인구가 3분의 1, 4분의 1까진 내려갈 거다’ 하는데” 하나도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사실관계 자체보다는 화내는 포인트가 나와는 너무 다르고 심지어는 대척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N번방 터지고 나서 SNS에서 해시태그 챌린지가 한창 돌 때, 제 남동생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다가 챌린지에 참여하는 글을 올린 거예요. 그런데 멘트가 “한국인이라면 다 같이 하자”였어요. 정말 짜증이 났는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가족끼리 얘기하다 N번방이 거론됐어요. 엄마‧아빠가 동생 이름을 부르면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니까 걔가 ‘불쾌하다, 나를 왜 의심하냐’는 반응이더라고요. ‘나는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왜 잠재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냐….’ 화내는 걸 보면서 짜증이 나더라고요. 화내는 포인트가 우리와는 너무 달라서.


빙봉: 저도 친구들이랑 막 술 먹으면서 울고 집에 갔는데, 저희 엄마도 제 스무 살 남동생에게 N번방 운을 띄웠어요. 동생이 ‘그게 뭐야?’라고 답했는데, 엄마가 너무 뿌듯해하는 거예요, 이 상황을 모른다는 거에 대해서. 참 미묘했어요….


노랑: 무게감의 차이가 커도 너무 크죠. 여자들이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그동안 국민청원 같은 건 의미 없다고 욕하던 친구들도 “야 국민청원이라도 해,” 하면서 모든 톡방에 텔레그램 관련 청원을 뿌리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인스타가 원래 되게 탈정치적인 SNS 공간이었다가 코로나와 N번방 사태가 맞물리면서 갑자기 인스타에마저 정치적인 해시태그가 생겨났잖아요. 다들 ‘할 수 있는 걸 뭐라도 하자,’라고 절박하게 생각한 건데. 두별 말대로 어떤 남자들에겐 이 릴레이 하나 참여하는 게 내 고결함을 인증하는 순간인 것 같았어요. 실감하는 무게나 진심의 차이가 너무 큰 거죠.


저도 N번방 기사 보고 나서 몸에 힘이 쪽 빠지는 거 있잖아요. 위가 뒤틀리는 거? 애가 끓는다는 느낌? 너무 괴롭다가 멍 때리고 있다가, 늦은 새벽에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페북 친구 및 제 사진을 정리했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옛날에 소라넷 같은 데서도 지인 능욕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 정리해야 하는데’ 싶으면서도 귀찮아서 정리를 안 했거든요. 그런데 기사에 났던 26만이라는 숫자가 너무 압도적으로 다가오고 이 정도면 분명히 지인 중에 한 명 정도가 아니라 여러 명 있을 것 같아서, 초등학교 중학교 이후로 연락 없는 남자애들 다 끊고, 제 글이나 사진들도 정리하고.


경하: 소라넷 이런 건 사실, 제가 평소에 접근하는 공간이 아닌데, 텔레그램은 활동하면서 진짜 많이 쓰거든요. 사건이 있고 나서, 친구 목록을 살펴보면 탈퇴한 계정들이 막 있어요. 근데 누군지 모른단 말이에요, 연락처 목록을 다 기억해 놓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보면서 이게 누구였을까 유추해보기도 하고. 


두별: 처벌을 생각하면 저는 뒤늦었다는 회의감도 회의감이고, 이게 진짜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까지 들어요. 정확한 참여자 숫자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래도 엄청난 인구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에 처벌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뭐 신상을 까발리든 감옥을 보내든 어떻게 하든, 처벌을 과연 진짜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고. 한국이 ‘안전한 사회’라고 말할 때, 그들에게 안전의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빙봉: 그니까 한국은 치안이 좋다는데 뭐, 카페에서 노트북을 안 훔쳐 가면 안전한 건가?


노랑: 그것도 되게 물리적으로 상상하는 거잖아요. 뭔가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문화와 존재하는 공식적 언어 간의 괴리가 너무 큰 거 같아요. 기자들의 언어, 법조인의 언어와 국회가 사용하는 언어와….


경하: 저는 그냥 그 텔레그램 방들에 있던 엄청나게 많은 남성 중 단 한 명도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자각하지 못했다는 게, 그리고 결국에는 또 다른 여성이 거기 들어가서 문제를 제기해야 했다는 게 되게 씁쓸해요.


노랑: 사람 몸에 칼로 글자를 새기고, 극단적 비유로 “여자들은 가정에서 ‘노예처럼’ 부려졌다”라고 표현하던 것이 어떤 공간에서 정말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게 참담했어요. 그런 걸 소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니 한국 사회의 ‘성적 욕망’이 어디로 가고 있지?


빙봉: 진짜, 제가 더 좌절감이 들었던 것도 그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욕망이라서?


노랑: 성적 욕망에 따라 야동이나 야한 만화를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야한 매체를 소비하는지가 문제인데,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남성 소셜의 어떠한 성적 소비는 ‘성욕’이라기보다는 굉장히 ‘능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야 하나요. 예를 들면 화장실 불법 촬영도, 누가 남이 소변이나 대변보는 걸 보고 싶겠어요. 그 자체로 내가 성적 충만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걸 볼 수 있는 나의 권력? 너의 은밀한 공간에 침투하고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강제할 수 있는 나의 힘을 생각하며 자위하는 거죠. N번방에서도, 여타 딥페이크 사진들도, 나를 화나게 하는 지인 여성, 나보다 높은 지위의 여성 얼굴을 오려 붙이고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조리돌림 함으로써 사실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 자신이 욕망해온 우위를 그 안에서 일종의 방식으로 연기하는 거죠. 결국에는 그런 ‘남성적 욕구’를 하나씩 방조한 게 텔레그램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케빈에 대하여> : 가해와 방조의 늪

가해자. 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해해야만 할까?


텔레그램 내 성폭력에 참여한 모든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원이 많았다. 그러다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되자 ‘26만 명’이 갑자기 하나의 얼굴로 귀결되었다. 그의 유년 시절과 대학 생활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듣고 싶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수만 가지인데 답이라고 제공된 것은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가해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피-가해의 구도와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를 함께 보았다. 영화는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는 케빈과 불행하고 불안한 엄마 에바를 보여주면서 시작해 그들의 과거를 추적한다. 세계를 누비던 여행가 에바(틸다 스윈튼)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케빈을 가진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것 자체가 고역스러운 상황에서 케빈이 엄마를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반항하는 바람에 에바는 점점 힘들어진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조용히 에바를 괴롭히던 케빈은 18번째 생일날 끔찍한 살인을 저질러 에바를 고통 속에 고립시킨다.



노랑: 저희가 이전에 잡은 세 꼭지로 텔레그램 내 성폭력에 관해 얘기를 해볼 건데, 빙봉님이 이전에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공유해줬었잖아요. 텔레그램 내의 성폭력에 있어서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가해자를 바라보는 “나”, 가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를 조금 구분해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빙봉: 저는 일단, 가해자를 우리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한다고 느꼈는데요. 첫 번째는 노랑님이 언급했듯이, N번방을 비롯한 성폭력 문제에서의 가해자를 마치 ‘빨리 변화하고 있는 여성 인권 이슈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한심하고 도태된 사람’이라는 정도로 인식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많은 페미니스트도 ‘옛날에는 이런 게 흔했기 때문에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기 어려울 수 있지만, 사실 사회는 바뀌었다’라는 식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세상은 변하는데 왜 자꾸 그렇게 구시대적으로 행동하냐-’ 라고 반응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거? 가해자들이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범죄/신기술을 앞장서서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가해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노랑: 텔레그램 내 성폭력 가해자들은 정말 기술의 최전방에 있는 사람들이죠. 이 사건 자체도 대단한 문화 지체 현상이고요. 기술은 발전하고 그에 맞춰 삶의 방식도 바뀌는데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알아서 빨리 업데이트되지 않으니까, 사실 이전에 있던 문제들이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라넷 때부터 웹하드까지, 지난 1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징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빙봉님이 말한 것처럼 일베나 소라넷을 몇몇 사회 부적응자들의 문화로 과소평가하면서 충분히 주목하지도 대응하지도 않았잖아요. 또래 중에 일베에 접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일베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실태를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주 느끼지 않았나요? 어쨌든 그런 구조적 방조 속에서 오랜 성착취와 성폭력, 문란한 여자에 대한 낙인의 계보 이런 것이 죄다 버무려져서 결국은 N번방을 낳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슬펐던 게, N번방을 고발하는 초기 보도 기사 내용이 너무 자세해서 처음에는 ‘이거 트리거 경고 없어도 되나, 2차 가해는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세한 설명을 보고 나서야 기성세대가 드디어 심각성을 느낀 거예요. ‘요즘 젊은 애들 맨날 남녀 갈라서 싸워대고 왜 이렇게 예민해’ 하던 사람들이 N번방을 알고서야 좀 우리 세대의 젠더 지형을 파악하고….


빙봉: 맞아요. 한편 가해자를 바라보는 태도의 두 번째로, 저희가 가해자를 악마화함으로써 ‘나는 가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을 그어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는 방에서 이렇게 가만히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가해자가 될 수 없고, 이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너희가 악마야’ 이렇게 선을 긋는 느낌이었어요.


경하: 저는 이 두 번째 포인트에 엄청 공감하는데, 가해자들이 자기의 범죄 사실이나 가해로부터 선 긋기, 그러니까 거리를 두는 것이 엄청 쉬워진 이유 중 하나가 N번방은 사실 자기가 직접 나서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제삼자가 그것을 대신해주고 결과물을 제공해주니 나는 관전만 하면 되는 형태이기도 하고, 들어갔더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책임 의식을 회피하기 쉬운 구조였던 것 같아요.


노랑: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함께 봤잖아요. 사전 좌담회 때부터 한국 매체들이 가해자 서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대한 불만을 공유했는데, 이 영화가 ‘가해자 서사’라는 것을 만드는지? 만든다면 어떤 뉘앙스를 취하는지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경하: 우리가 비판하는 가해자 서사 만들기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책임을 없애고 회피할 수 있게 하려고, 혹은 변명하기 위해서 서사를 만드는 느낌이 있다면 <케빈에 대하여>는 오히려 그 책임을 끈질기게 물으려고 한 것 같아요. 그니까 없는 것을 쌓아 올리면서 변명하거나 선을 긋는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사람이 이런 범죄를 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있어서? 그 과정에서 에바가 죄책감을 느끼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잖아요. 한쪽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서사고 한쪽은 오히려 그걸 더 집요하게 묻기 위해 만들어지는 서사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영화 원제가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잖아요. 가해자의 이야기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왜 사회가 이런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N번방이 ‘일부 악마의 소행’이 아니라는 저희의 논점과 겹쳐 보였던 것 같아요. 케빈이 특이한 악마 같은 아이라기보다는 온전히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느껴서. 


노랑: 동의해요. 결국 파헤치는 저의와 태도가 중요한 거겠죠. 다들 혹시 이 영화가 누군가를 탓하고 있다고들 느끼셨나요?


빙봉: 저는 그게 이 영화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경하가 짚어주었듯이 이 영화의 원제가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잖아요. 이 영화의 인물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들, 그리고 그 가해자가 단숨에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한 상관관계 속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느낌이었어요. 저희가 주로 차용하는 가해자 서사의 문제가 되게 양극화되어 있는데, 가해자를 굉장히 영웅시하거나 혹은 굉장히 피해자화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이 영화의 장점이자 특징이, 누군가를 탓하기 어려운 느낌이라고 생각해요. 이 엄마가 정말 잘못된 양육방식을 가진 건가? 그래서 케빈이 범죄자가 된 건가? 아니면 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앤가? 이런 식으로 많은 생각을 들게 하잖아요.


노랑: 폭력과 피해의 순환 고리를 영화가 잘 보여주죠. 처음에 에바는 사실 임신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디에 정착할 만한 성격의 인물도 아니었고, 본업이 여행가라는 게 나중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덜컥 임신해버리면서 남편의 강요에 의해 정착했어요. 모험간데 모험을 못 하고,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아이를 돌보는 신세가 되는데, 아이의 존재 자체가 준비되지 않은 엄마에게는 짐이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게 느껴지니까 아이는 나름대로 피해 의식과 욕구불만을 가지며 자라고. 이 끊임없는 폭력의 순환 속에 갇힌 걸 보기가 너무 괴롭더라고요. 한편 저는 에바의 남편이자 케빈의 아버지인 프랭클린의 간접적인 폭력이 인상 깊었어요. 영화 속에서 제일 평범한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관대하다”고 일컬어질 사람인데, 사실은 모든 것을 오로지 관습적으로 해석하면서, 빙봉님이 말한 것처럼 복잡하고 “촘촘한 상관관계”를 전혀 파헤쳐 보려고 하지 않잖아요. 에바가 어린 케빈의 폭력성에 대해 남편과 상의하고 싶어 할 때마다 “어린 애가 그럴 리 없지” “당신 뭐라고 하는 거야” “애를 지켜줘야지”라면서 에바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케빈을 신경 쓰는 척하지만, 케빈에 대해 “talk about” 할, 이야기 나눌 기회를 모두 묵살시켜버리죠. 그는 당위의 대화들만을 해요. 저는 그 아버지가 일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착하다는 믿음을 가지잖아요. <한공주>에서도 가해자 부모들이 공주한테 “우리 아들은 어쩔 수 없이 그랬다”,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니가 우리 아들 인생 망칠 거냐” 등등의 말을 쏟아부으면서 사랑하는 자녀를 감싸들려 하고, <서치>에서도 형사가 자기 아들이 살해 용의자인 걸 알면서도 “제 아들은 달라요. 당신이 이해해야 하며” 그런 말을 하죠. 내가 사랑하니까 이 사람의 잘못을 직시하기도 전에 무조건 용서하고 감싸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케빈에 대하여>는 그런 무조건적인 옹호가 과연 사랑인지 방조인지, 보호인지 가해인지, 그 애매한 책임의 지점에 대해서 굉장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요. 그 책임의 구조가 케빈을 탄생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부분이 참 좋았어요. 다양한 관계와 구조를 조망하면서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도 흐리게 만드는 것 같아요.


빙봉: 엄청 와 닿네요. <케빈에 대하여>에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엄마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사실 정말 말하지 않는 사람은 아빠일 수 있다는 거? 저는 가해자가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 필요한 지점이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가해자를 연민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는데, 우리가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케빈을 이해하게 되면서도 그를 연민하고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고만 판단하진 않았잖아요. 케빈이 감옥에 가지만 아무도 후련하지 않고요. 영화가 재현하는 가해자에 대한 인식을 보고 분명히 저희가 성찰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공주> : 여성 - 남성 청소년의 성차

청소년을 구획하기 위해 섣불리 젠더 이분법을 택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성과 남성 청소년이 집단으로서 경험하는 성적인 세계는 정말이지 다르다. 청소년의 성범죄 피가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 <한공주(2013)>를 골랐다. <한공주>는 실제 밀양에서 발생한 여학생 집단 강간 사건을 배경으로 하며, 사건 이후 피해자가 살아가는 일상을 그려낸다. 영화의 초입부터 공주(천우희)는 전학을 간다. 공주의 엄마는 3년 전 집을 나간 후 연락 두절인 데다가 재혼을 했고, 아빠는 오랜만에 만난 딸 앞에서 술주정을 부리는가 하면, 합의금에 눈이 멀어 공주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에 서명하라고 한다. 그나마 공주를 챙겨주는 유일한 어른은 이전 학교 선생님인데, 본인의 어머니네 집에 공주가 머물 곳을 마련해주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최소한의 관심을 줄 뿐이다. 영화 속 어른들은 아무도 공주를 충분히 책임지지 않는다. 




노랑: 텔레그램 내 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해 더 면밀히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청소년과 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자 중에 경찰이 식별한 사람만 103명인데, 10대가 26명으로 가장 많았고, 가해자 또한 상당수가 미성년자 남성이라고 알려졌어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WeTee)에서 올린 논평의 제목 또한, <왜 누구에게는 ‘N번방’이었고 누구에게는 ‘일탈계’였나>인데, 청소년들의 성적 실천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대조되기 시작했는지? 어떻게 이렇게 한쪽 젠더가 소비자고 한쪽이 피해자인 구조 속에 갇히게 된 건지 이야기해볼까요?


노랑: 우선 이 영화가 남성 소셜을 잘 파헤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처음에 공주네 집에 가해자 남학생들이 쳐들어갔을 때 공주 친구 화옥이가 술에 취하고, 남자애들이 몰래 화옥이 몸 사진을 찍잖아요. 찍는 사람은 한 명이지만 많은 남학생이 조용히 거들고, 몇 명은 거들지는 않지만, 옆에서 방관하고. 그런 식으로 남자들끼리 묵인? 동조, 방조하는 장면이 많아요. 심지어는 영화가 그런 남자애들이 커서 어떤 성인이 되는지까지도 잘 암시한다고 생각했던 게, 공주가 남고생들이 동윤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자마자 남학생 한 명이 전화기를 뺏더니 “저 무슨 형사님 아들인데요” 하니까 아무 문제없이 넘어가잖아요. 공주가 가해자 부모들에 의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남경찰관이 “내가 아는 분 부탁인데” 하며 공주에게 강요와 다름없는 선처를 부탁하고. 동윤네 아버지는 수많은 남성 청소년에게 공주와 화옥이 강간당하는 현장을 보고도 누구를 혼내거나 신고하기는커녕 자기 아들만 데리고 빠져나가죠. 견고한 남성 카르텔을 잘 구현한 것 같아요. 그 사이에서 계속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고립되고 도망가야 하는 존재는 피해자인 공주고. 공주가 영화 초입에 난데없이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이러고, 끝날 때도 “제가 사과를 받는데 왜 저는 도망가야 해요?”라고 하잖아요.


동시에 이 영화가 청소년 성차를 잘 보여주기도 해요. 공주의 여성 친구들은 키스 이야기도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조심히 물어보는 한편 남학생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장난 속에는 꼭 성적인 추행이나 폭력이 섞여 있죠. 공학 다니면 남자애들이 대놓고 성적인 농담하는 거 엄청나게 자주 보지 않아요? 저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저희 중학교가 완전 남초였는데, 남자애들이 허구한 날 자위 농담, 섹스 농담을 하면 여자애들은 그저 못 들은 척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남자애들이 한 여자애 공책을 몰래 뒤지다가 야한 낙서를 발견한 거예요. 뒤진 것부터가 문제지만 어쨌든 그 노트가 저희 학년 열두 반에 다 돌고, 그 여학생은 낙서를 빌미로 따돌림을 당했었어요. 남녀 청소년의 성적 실천과 그 간극은 예전부터 심각했지만, 이제는 진짜 극단적으로 온라인 공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프라인에서 바로 옆에 붙어 앉아있는 수준인 거 같기도 하고….


두별: 저는 공학 중학교에서 여고로 진학하면서 차이를 크게 체감했는데, 공학에 다닐 땐 야한 농담을 남학생들이 주로 했고, 걔네가 주변의 여학생들을 놀리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 농담이 되게 수치스럽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여고에 가니까, 여자애들끼리만 있다고 교실에 있는 티비에 대놓고 야한 영상을 틀고 여자애들이 야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 처음엔 그런 게 당황스러웠지만, 나중엔 익숙해지기도 했고 친구들끼리 “여자들은 왜 야한 거 보면 안 되는데?”라고 얘기하고 그랬어요. 이게 저한테는 긍정적 환기가 되었던 게, 여성도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안에서 성적인 얘기를 하는 건 금기시될 게 아니구나? 괜찮구나-를 느낀 첫 시점이었거든요. 어떤 곳에서 남녀 청소년들의 성적 실천과 욕망의 구체적인 차이가 시작되는지 궁금하더라고요.


한편 저는 영화에서 드러나는 학생들의 커뮤니티가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종일 공부를 해야 하는 도시 아이들의 커뮤니티와는 달리 조금 더 한산하고 여백이 생길 수 있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위화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학교 분위기여서 이게 청소년의 삶을 리얼하게 재현한 건지 말을 못 하겠는데….


노랑: 두별이 말한 생경함의 이유로 계층성도 정말 큰 것 같아요. 솔직히 청소년기에 저나 제 친구들 상당수가 경험한 것은 밤 10시만 넘으면 엄마‧아빠가 “언제 들어와? 왜 이렇게 늦어?” 이러는 부모님의 어쩌면 짜증나고 어쩌면 반가운 감시와 통제잖아요?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런 게 전혀 없이, 완전히 붕괴된 가정과 모래 알갱이처럼 휘날리는 학생들을 보니까 더욱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공주가 버스와 차들이 슝슝 지나가는 밤길을 혼자 걷거나 뛰어가는 신이 많잖아요. 그걸 볼 때 저희가 느끼는 한산한 불안감이 특정 계층성을 지닌 청소년들의 삶을 관통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텔레그램 내 성폭력 피해자도 상당수 일탈계를 운영하는 미성년자 여성들이었는데, 디지털 성범죄가 기존의 사회적 불균형, 취약성, 폭력 등을 그대로 답습하고 극대화한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 씨앗을 <한공주>에서 많이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경하: 정말 성적 실천에 관한 금기도 금기인데, 청소년의 경제적 권리와도 떨어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일탈계 운영에 재미 목적도 있지만, 자립하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운영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한편, 정부에서 운영하는 지원 센터에서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입은 청소년한테 ‘이걸 지우고 싶으면 부모님 허락을 받아와라’고 얘기해서 청소년들이 도움을 못 받기도 하고, 가해자가 ‘부모한테 너 이런 거 하는 거 알리겠다’라고 말하는 게 협박이 되기도 하는 현실이잖아요. 여성 청소년이 일탈계를 운영했을 때, 청소년이 부모와 가정에 어느 정도 종속된 존재고 거기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현실이 그들을 더욱 사각지대로 몰아넣는다고 생각했어요.


노랑: 맞아요. 나이 지위와 계층 지위가 맞물리는 지점인데, 기사를 몇 개 찾아봤거든요. 지난해 가출 청소년이 2만 명 정도인데, 경찰에 접수가 들어온 인원 기준으로만 2만 명이래요. 사실상 더 많다는 거죠. 한편 다른 기사를 보니까 위기 청소년 중에 47.5%가 돈 등을 대가로 약속받고 성관계를 하는 조건 만남을 경험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중에 거의 7~80% 인원은 가출한 이후에 조건 만남이라는 세계를 경험한 거죠. 이 세계가 그대로 이어져서 일탈계를 탄생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아요. 한편 성적 주체성 측면에서, 아저씨들이 소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대충 유추가 가능한데, 소녀가 왜 굳이 아저씨를 만날까 의아하지 않아요? 생각해보면 청소년 때는 어른들의 시선만큼이나 또래의 시선이 무섭잖아요. 이 지역 청소년의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엄청 강력한 처벌과 감시의 기제가 작동해요. 그런데 또래 남자들과 자면 남학생 입장에선 명예에 아무 손해가 없고, 오히려 훈장처럼 생각하고 떠벌릴 확률도 있으니 다른 세대의, 그리고 금전적 여유가 있는 남성과 자는 게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빙봉: 조건 만남 이야기를 더 하자면, 조건 만남이 집단으로 일어나는 데가 청소년들끼리 만든 가출팸인 것 같아요.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 돈 벌어서 모텔비 내고 있는데, 너도 돈 벌어야지’와 같은 상호압박 속에서 서로서로 일탈계를 포함한 돈벌이 방식들을 서로 추천해주고? 그게 꿀팁처럼 향유되는 부분도 있고 그런가 봐요.


노랑: 이번에 피해자 탓하는 사람들 정말 많았잖아요, 심지어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사람 중에서도. 트위터에서 단적으로 많이 쓰던 용어가 너희들의 ‘쿨걸 놀이’가 업보로 돌아오는 거라고. 그거 듣고 깜짝 놀랐어요. 여자들이 피해자들을 겨냥해 이딴 글을 올리는 심리가 뭘까 했을 때, 본질은 남자들이 조주빈하고 선 긋는 거랑 똑같은 거 같아요. 이 여자들도 ‘난 저런 성적 실천은 절대 안 해’라고 선 긋고 정신 승리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한편 우리 사회가 청소년과 아동 보호를 미진하게 하면서, 케빈 아버지처럼 실질적 보호를 제공하진 않으면서 모두 당위로 충당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죠. “어른이 당연히 어린 애한테 안 그러겠지,” 그러다가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가 발생하면 “아니 그 사람은 다 커서 왜 그래? 애한테 왜 그래?” 당장 청소년들에게 콘돔이나 사후피임약이 필요한데 “청소년들? 섹스 안 하겠지. 하면 안 되지.” 아무 대책이 없어요.


빙봉: 맞아요. 피해자 여성들 몇몇이 일탈계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결한’ ‘숭고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아닌 게 새로운 구도였죠. 노랑님 말대로 N번방 피해자들을 문제시하던 사람들은 ‘청소년? 그런 거 올리면 안 되지. 모르는 사람들 보는 데에서 내 몸 사진을 올리면 안 되지’라는 가치 판단에서 끝나버리고 상황 이해로 넘어가질 않으니까. 한편으로는 또 성적자기결정권을 끌고 와서 ‘이 일탈계 청소년들이 자기 몸 사진을 올렸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닐까?’ 혹은 ‘자기가 자발적으로 한 거니까 할 말 없지 않나?’라고 생각하잖아요. 우리나라가 아동‧청소년을 ‘순수’한 무성적 존재로 상상하지만 만일 그들이 어른과 섹스하거나 동영상을 찍는 게 좋다고 했으면 그건 또 ‘어쩔 수 없지. 쌍방 과실이지,’ 라면서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 그 선택적인 해석이 너무 이상하고….


노랑: 이상해요 진짜. 한국 법에서 되게 큰 문제가, 그루밍이 법적으로 처벌이 안 되잖아요. 미성년자가 담긴 포르노를 제작하거나 미성년자와 성년 간의 성매매가 발생한 경우에도 자발과 강제를 구분해서 어찌하건 청소년이 yes를 했으면 자발적 참여로 보고 그 청소년까지 처벌하는 행태를 여태 지속했는데,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경제적 계층성과 수많은 한계가 있으니까, 과연 그 yes가 yes인가를 더욱 면밀하게 뜯어보아야 하는 게 맞죠.


빙봉: 그걸 칭하는 호칭도 다르더라고요. 아동 성매매가 발생했을 때, 연루된 아동‧청소년 본인이 성매매에 동의했다고 하면 ‘성매매 피해자’가 아니라 ‘성매매 대상 아동’이 된대요, 즉 대등한 섹스인 것처럼? 


경하: 그래도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되면서 ‘대상아동·청소년’ 조항을 삭제하기로 했어요. 원래는 ‘만약 네가 몇 살 이하인데, 성인과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했다면 너도 소년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 처벌받기 싫으면 궁박한 상황이었음을 증명해라’ 이런 식이었는데, 이제는 성매매 시장에 유입될 수밖에 없었던 청소년들을 ‘피해아동·청소년’으로 규정하면서, 좀 더 사회적 위계나 경제적 요건을 고려한 판결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노랑: 여담인데 영화를 보면서 새삼 든 생각이, 한국이 와이파이도 빠르고 기술 발전도 세계적으로 잘 된 국가고, 그보다도 사람들이 온라인에 정말 많이 접속하잖아요. 미국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2017)>를 포함해서 여타 청소년 영화/드라마를 봐도 미국 고딩들은 여전히 오프라인 위주의 삶을 살고 있는데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관계 맺음에서는 온라인 관계와 자아를 뺄 수가 없는 게 새삼 희한하더라고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한공주> 속 가해자 남학생들이 가해 시에 고릴라 가면을 쓰는 것도 너무 한국 정서 그 자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선 사람들이 명예를 엄청 신경 쓰고 일상적으로 눈치를 보기 때문에 오히려 온라인 공간에서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것 같아요. 평소엔 앞에 나서는 데에 소극적이지만 나의 신상과 얼굴이 가려지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는 거죠. 영화 속 가해자 학생 중 한 명이 공주 친구 동윤이에게도 고릴라 가면을 씌워주면서 “가면 쓰니까 (강간할) 용기가 더 생기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너무 메타포 같은 거예요. 비윤리적인 짓을 삼가지는 않는데 반드시 철저하게 나의 얼굴은 숨기는? 그 장면이 여러 온라인 폭력과 N번방과 엮여서 보였어요.


두별: 명예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다 보니까 평소에 드러내거나 분출하지 못했던 그런 것들을 익명 또는 가면을 벽으로 세워서 그 뒤에서 마음껏 난리를 치고 다니는 거잖아요. 오히려 명예라는 게 모순적으로 또 다른 왜곡을 만들어내는 느낌도 들었고. 




<서치> : 디지털 세계의 언어와 상상력

이번에는 N번방이 만들어진 ‘공간’ 자체에 집중해본다. 디지털 성범죄는 결국 ‘디지털’ 성범죄다. 우리 세대에게 익숙한 세계가 된 ‘디지털’과 그 안의 폭력, 그리고 그에 맞는 법과 정치를 이야기하기 위해 <서치>를 골랐다. 영화 <서치(2018)>에서 데이빗(존조)은 실종된 딸 마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쓸 만한 오프라인 단서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마고의 노트북, 구글 계정, SNS, 문자 메시지를 통해 딸의 행방을 추적하며 데이빗은 전혀 몰랐던 온라인 세계, 그리고 마고의 생각과 삶의 일면을 새로이 알게 된다.




노랑: 텔레그램 내 성폭력이 디지털 공간 내에서 발생하기도 했고, 코로나라는, 다들 분리되고 특히나 온라인 공간을 많이 활용하는 시대적 지형 속에서 터졌잖아요. 저는 그게 되게 기괴했거든요. 한쪽에서는 오프라인 질병으로 인해 과하게 단절되어가는데, 한쪽에서는 N번방이라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침범당하고. 우리가 온라인에서의 거리감을 언제쯤 제대로 조정할 수 있을지, 미래의 정치를 어떻게 상상해야 할지 그 향방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들어요.


경하: ‘디지털’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더 주목했으면 좋겠어요. 이게 여성혐오적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했지만, 어쨌든 엄청난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대응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거잖아요. 법안을 도입하는 사람들이 너무 기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법안을 도입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디지털 성폭력의 많은 특성을 세심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어서, 기술적인 측면 자체에 대해 심도 있는 고려가 필요할 것 같아요.


빙봉: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법을 제정하려고 하니까, 단순히 형량을 높이는 방식으로 법을 바꾸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형량이 높으면 판사나 검사들이 되게 망설인대요, 불기소처분 될 확률이 훨씬 높아지고 그래서. 형량을 높이자는 말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닌 거죠.


두별: 최대 형량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자의적으로 구형을 하는 거잖아요. 이런 ‘디지털’ 성범죄들에 유독 덜한 형량을 책정하거나 심지어는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꾸준히 흐지부지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N번방도 작년부터 논란이 되었던 일이고, 앞서 말했듯이 비슷한 일은 N번방 이전에도 어디서나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건들의 재판이 시작되더라도 막상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게, 디지털이라는 공간의 모호함과 특수성 때문에 더욱 처벌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노랑: 영화 <서치>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공감 가거나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하네요.


경하: 아빠가 단서를 찾으려고 할 때 모르는 게 진짜 많고 혼란스러워하잖아요. 정말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고 그거에 따라서 범죄의 양상도 엄청나게 빨리 변하고, 정말 한 세대만 올라가도 디지털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노랑: 맞아요. 그게 진짜 현실적이지 않아요? 기성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온라인 공간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세계이자 문법이 있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저희가 장례식을 잘 안 가봐서 장례식에 적합한 절차도 잘 모르니 어른들에게서 배우고, 공식적인 자리에 가면 양복을 입고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우고, 차례를 지낼 땐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를 익히거나…. 그런 오프라인 세계의 관습과 문법들이 있는데, 그런 일련의 오프라인 전통들이 우리에게 생경한 만큼 기성세대도 인스타와 페북에서 드러내는 자아나 각 플랫폼에서 나누는 말들이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는 거잖아요. 온라인 문화의 세밀한 특성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입법이나 정치를 도맡고 있기 때문에 상상력의 한계들이 등장하지 않나. 전통적인 국경의 범위를 넘어서서 범죄를 수사하지 못하는 것이나 온라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성범죄의 정도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나? 


경하: 한편 영화 속에서 디지털 공간이 연달아 바뀌고 모르는 사람들의 계정이 등장하니까 보는 제가 불안해지는 거예요. 초반부터 ‘딸 마고가 디지털 성범죄를 당했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한 예감부터 계속 들었고, 결국엔 그런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가짜 계정을 가지고 마고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고 나서는 정말로 디지털 성범죄 시나리오부터 완성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디지털 범죄에 대한 저의 만연한 불안감을 재확인한 시간이었어요.


노랑: <한공주>에서도 친구들은 별 의도 없이 기록하고 추억 쌓으려고 일상을 촬영하고, <서치>에서도 가족 영상을 찍고 백업하고 나중에 뒤적여보는 장면이 나와요. 저희에게 아주 익숙한 모습인데, 반면 공주는 트라우마 때문에 모든 종류의 촬영에 예민하잖아요. 그리고 자신의 피해 영상을 사람들이 볼까봐 언제나 마음 졸이는데, 실제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친구들이 공주가 등장하는 불법 촬영물을 찾아보죠. 촬영과 기록이 쉬워진 만큼 유포와 접근 또한 쉬워져서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 조절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무서운 것 같아요. 내가 나의 바운더리를 설정할 수 없고, 원하는 정도의 ‘나’만 공유할 수 없다는 점. 필요할 때 감추기도 어렵다는 점. 그런 점과 연관해 디지털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대책이 더 필요할 것 같고. 한편 <서치>에서도 수사 초반에 ‘마고는 분명히 아버지가 죽였다’하는 썰이 관심을 받고 빠르게 퍼지는데, 인터넷에서는 사실과 다르더라도 이목을 끌 만한 정보들이 쉽게 생겨나고 쌓이고 동시에 쉽게 휘발되고, 면대면 범죄에서처럼 맞으면 병원 가고 돈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온 영상을 계속 누군가가 복제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해외로 넘어가고, 이렇게 온라인 범죄는 맺고 끊음이나 참여자들이 확실하지 않은데, 이에 알맞게 대처할 수 있는 법적 상상력이 아예 없다는 게 참….


하지만 인터넷을 그저 사회악으로 판단하기에는 안전망이기도 하고, 우리가 이렇게 잘 알고 미워하고 고민을 공유하는 것부터가 온라인 세계가 얼마나 우리의 일부가 되었는지 반증하는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난데없지만, 법적으로도 이 영화 같은 개혁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게, 영화계에도 오래된 문법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를테면 현대 사회와 디지털 문화를 그려내려는 영화들마저도 대부분은 그 문법을 따라서 오프라인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데, 이 영화는 ‘아니야, 이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디지털 화면과 온라인 공간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라고 선언하고서 성공적인 실험을 해낸 듯한? 우리가 현실에서 감각하는 것들을 영화로 잘 통역해낸 것 같아요. 법적으로는 이처럼 생생한 작업이 안 되고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답답한 것 아닐까요. 온라인의 관계와 거리감과 속도를 잘 이해한 채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는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법에 디지털의 세계를 욱여넣으려고 하니까. 다른 형태의 상상력을 제공하는 영화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별: 뭐랄까, 처벌의 정도나 이걸 해결할 방식에 대해서 저 자신이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한공주>에서 공주가 수영을 악착같이 배우는데, “혹시나 나중에 살고 싶어지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배우는 거라고 하잖아요.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발악인 건데. 어떻게든 그래도 살고 싶다는 그 의지가 계속 마음에 박히더라고요.


빙봉: 정말 요즘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계속 생각해요. 일련의 사건이 지날 때마다, 아 이 사회에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지. 그 길을….


노랑: 그거 저희 감상에 딱 맞는 마무리 멘트네요. 어떻게 이런 현실을 살아낼지, 우리가 어떻게 죽지도 죽이지도 않고 공생할 수 있을지…. “저희는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점.”



텔레그램 내 성폭력은 매달, 매년 발생하던 무구한 성폭력, 성착취 사건의 계보에 놓여있다. 일베나 웹하드가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정말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절실한 마지노선에 섰다.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한지도 모르는 채로 온갖 묘연함 속에서 부유한다. 어쩌면 속 시원한 변화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무언가를 바꾸기엔 너무 늦은 것만 같기도 하지만, 해일 앞도 아니고 그 한가운데에서라도,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조개라도 어떻게든 주워보려는 심정이다.


디지털 성폭력은 오프라인 범죄와 달리 얕은 참여자가 수도 없이 증식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범죄자를 식별해내려다가 흐지부지 끝나거나, 운이 좋을 때도 고작 한두 명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미진하게 처리되었다. 그래서 해결되지 못했다. 가해자를 언제나 단순히 타자화해온 언론계의 풍습, 청소년 시절부터 답습하는 만연한 강간 문화, 청소년의 취약성, 피해, 폭력 그 무엇도 제대로 책임지지는 않은 법조계의 태도, 디지털/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성세대의 몰이해와 방조가 뒤섞이고 합쳐져 N번방을 만들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도 지난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N번방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고루 고쳐야 할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말해야 할 것들을 말하지 않아 여기까지 밀려왔다. 침묵이 더 큰 침묵과 무기력을 만들어냈음을 상기하며, 다만 계속 살아가자고, 그리고 집요하게 이야기하자고 다짐한다.




참여 / 편집위원 경하노랑두별빙봉

기획, 정리 /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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