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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그리고 마음. 사람들은 종종 이 둘을 구분하여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이 진정한 ‘나’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몸은 내가 세계를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틀, 나를 규정하는 첫 외곽이자 내가 감각하는 오롯한 현실이 된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알아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내 몸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면서 몸과 친해지는 시간 또한 포함된다. 월경 기간에는 잠을 얼마나 자야 그나마 평소와 비슷한 수준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매운 것까지 탈이 나지 않고 먹을 수 있는지, 여행을 다닐 때는 얼마나 걸어야 지치지 않고 적당히 좋은지는 모두 ‘나’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중요한 앎이다. ‘습관’이랄 것은 거의 모두 몸의 영역이며, 친구의 발소리와 말투, 자글자글한 눈웃음처럼 우리가 반갑게 사랑하는 것들도 상당수 몸과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는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세상을 만난다.


한편 이 물리적인 몸은 끊임없이 상해를 입고 취약해지는데, 몸이 삶의 근간인 것을 알기에 그것의 훼손이나 소실 가능성은 언제나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죽음’이라는 상태를 탄생시키는 것도 다름 아닌 우리의 물리성이다. 몸이 소진되는 순간 우리의 삶과 만남 또한 그친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가장 근본적인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다. 어쩌면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몸으로 온전히 떠안게 되는 고통의 현실이나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삶을 더욱 필사적으로 붙잡고, 그 제한적인 몸에서 비롯되는 나의 공포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공감하고 서로를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어차피 죽을 건데, 왜 태어났니”


초등학생들이 생일 축하 대신 부르곤 하는 이 우스꽝스럽고도 지독한 노래 가사는 의외로 죽음의 존재가 주는 허무를 꽤나 직관적으로 담아냈다. 삶의 시작을 기념하면서 삶의 끝을 직시하다니, 종말로 달려가면서도 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가장 기괴하고 아이러니한 생의 조건마저 표현했다고 확대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는 디즈니 영화를 사랑했다. 클래식한 디즈니 영화들이 몸선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특히 좋았다. <인어 공주(1991)>의 애리얼이 손을 뻗는 자태나 <포카혼타스(1995)>에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곡선은 모두 일말의 주춤거림도 없이 부드러웠다. 디즈니 화가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움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능하다. 둥글고 가벼운 선들은 몸무게와 삶의 무게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춤과 희망의 미래를 구현하고, 벅찬 음악, 따뜻한 스토리와 어우러져 저마다의 꽃길을 지어낸다.


여전히 관성처럼 새로 나오는 디즈니 영화를 챙겨보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세계가 내 애매한 삶과는 사뭇 멀다고 느꼈다. 내 삶은 어느 정도 지긋지긋하면서도 적당히 사랑스럽고, 세상은 끔찍하지만 또 소중하고, 당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또 어떻게든 살고 있고, 평소에 큰 감정 기복도 없이 그저 “참 괜찮다” 싶은 순간이 더욱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미묘한 한편 참으로 단순하기도 해서, 이유 없이 짜증이 나거나 몸이 무거워죽겠는 날도 있고, 때론 잘 내린 커피 한 잔이 하루 치 활기를 가득 채워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일말의 심심함과 모호함 없이 명쾌한 디즈니의 이야기와 화려한 캐릭터들이 다소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마저 있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졸업하고 싶어질 때쯤 선물처럼 ‘스톱모션’을 만났다. 뼈와 그림자를 갖춘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세계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인형, 극

스톱모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형과 인형극을 먼저 훑어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오래도록 인간을 닮은 대상에 대한 경외나 믿음을 품어왔다. 여전히 동네 종교 시설에 가면 성모 마리아상이나 예수상, 부처상 앞에서 누군가 경건한 인사나 절을 올리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세계의 아이들은 바비나 콩순이 인형을 보물처럼 아끼면서 인형 놀이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일상의 다양한 곳에서 인형은 대표적인 감정 이입 혹은 자아 투영의 대상으로서 존재해왔다.


인형의 생명을 상상하는 태도는 인형을 다룬 이야기와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피노키오(1883)> 이야기와 러시아의 <페트루시카(1911)> 발레 극은 각각 인형이 요정의 주술을 통해 ‘영혼’을 얻었으나 ‘진짜 사람’이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내용을 담았고, 특히나 <페트루시카>는 인형이 갑자기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사랑, 증오, 질투심에 짓눌려 두려워하는 모습을 담았다. 인형이 온전한 생명을 가지지는 않았을지언정 어느 정도 인간과 삶의 감각을 공유하는,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인 존재인 것처럼 바라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반도에는 몇백 년 전부터 죽은 사람의 상여에 붙이는 사람 모양의 인형 ‘꼭두’가 있었다. 꼭두는 망자가 저승에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웃음을 제공하고 보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승과 저승 간의 전령,” 혹은 현실과 꿈을 넘나들 수 있는 준-인간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이 꼭두들은 조선 후기에 가서 한국의 유일한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의 주연이 되었는데, 인간과 닮은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이입의 대상이 되는 인형은, 인형극 안에서 걷고 말하고 휘어지고 춤추고 부서지면서 생명을 얻었다.


어느덧 실물 극보다는 영화가 극장의 주를 차지하고, 디즈니의 <코코(2017)>와 <겨울왕국(2013)>처럼 매끄러운 CGI로 완성한 작품들이 유행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여전히 삐거덕거리는 인형들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스톱모션(stop-motion)의 세계가 있다. 스톱모션은 애니메이션 촬영 기법의 하나로, 물건들을 1프레임 단위로 조금씩 움직여가며 사진을 촬영한 후, 그 사진을 빠른 속도로 이어 붙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편집하는 것인데, 결국 영화로 담아낸 인형극이나 다름없다. 프랑스 영화 <프린스 앤 프린센스(2001)>와 같이 종이를 오려내어 빛을 투사하는 컷아웃(cut-out) 스톱모션, <러빙 빈센트(2017)>와 같이 물감/모래 아트를 이용한 스톱모션 등 다양한 종류가 존재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계에서 ‘스톱모션’이라 칭할 때는 보통 <패트와 매트(1976-)> 시리즈, 영화 <치킨런(2000)>처럼 찰흙으로 인형을 만들어 촬영하는 클레이메이션(claymation), 혹은 관절과 뼈대를 갖춘 인형에 얼굴과 부위별 조각을 바꿔 끼워가며 촬영하는 퍼펫-모델(puppet-model) 유형을 말한다. 특히 이 퍼펫-모델 기법이 매우 사랑받고 있는데, <유령신부(2005)>와 같은 팀 버튼 감독의 스톱모션들, 웨스 앤더슨 감독의 <판타스틱 Mr. 폭스(2009)>와 <개들의 섬(2018)>, 그리고 <코렐라인(2009)>을 포함한 스톱모션 프로덕션 Laika의 작품들이 전부 관절 인형을 만들어 사용했다.


<유령신부 (2005)><박스트롤(2014)>
<유령신부> 촬영 현장<박스트롤> '엑스'의 얼굴들



<핑구>, <패트와 매트>와 같은 귀여운 무성 스톱모션부터 다소 고어(gore)한 초현실주의 스톱모션까지. 스톱모션이 다루는 내용의 스펙트럼은 끝도 없이 넓지만, 그 결을 살피다 보면 물리적인 뼈대와 부피, 무게, 그리고 그림자를 지닌 인형들을 사용하기에 스톱모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느껴진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2015)>이 감정 세포 기쁨이와 슬픔이 간의 조화를 강조하듯, 유년의 악몽과 삶의 끈적한 모호함을 이해하는 것 또한 절실한 순간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애니메이션이 찬란한 환상과 희망을 전유한다면, 스톱모션은 악몽과 일상적 두려움을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기법일지도 모른다.




뼈를 움직이고 피부로 맞닿으며,

스톱모션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독, 불안, 공포 등의 크고 작은 고통을 생생하게 공유한다. 어쩌면 신체를 얻는 순간 생기는 불가피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날아다니는 선으로 구현되는 대신 우리가 사는 차원 속으로 소환돼 실존하는 몸의 형체 속에 갇힌 그 순간부터, 인물들은 정교한 힘의 작용으로 중력과 삶의 무게에 맞서 분투해야만 숨 쉴 수 있는 존재들이 되고 만다. 영화 <코렐라인(2009)>과 <메리와 맥스(2009)>는 모두 그 무거운 부자유(不自由)를 안고서 삶을 이야기한다.


영화 <코렐라인>의 11살짜리 주인공 코렐라인은 늘 따분해한다. 까다로운 엄마와 낭만주의적인 아빠는 둘 다 자기만의 세계와 일에 빠져 딸은 뒷전이고, 매일 토사물 같은 요리를 내어준다. 둘밖에 없는 친구들을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 왔는데, 이웃 중 유일한 또래인 와이비(YB)는 영 괴상하고 음산하다. 새로운 집도 사람들도 모두 짜증 날 뿐이다. 남색 단발에 볼 가득 주근깨가 자글자글하게 난 코렐라인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활보한다. 그는 꽤 어설프고, 또 엄마아빠만큼이나 자기중심적이기도 하지만, 그가 입고 다니는 노란 우비만큼 톡톡 튀고 재밌다. 코렐라인은 호기심이 많고 쉽게 기죽지 않으며, 이웃들이 멋대로 자신을 “캐롤라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인상을 푹 찌푸린 채 집요하게 정정한다. 이토록 비뚤어지고 사랑스러운 어린이 여주인공이 또 있나 싶다.


코렐라인네 식구에게는 주택을 같이 사용하는 두 이웃집이 있다. 윗집에 사는 보빈스키는 실패한 러시아 무용수다. 보빈스키는 반려쥐들과의 완벽한 서커스를 꿈꾸지만, 쥐들이 그가 원하는 만큼 절도 있고 유려하게 춤추지 못해 끊임없이 그들을 훈련시킨다. 한편 아랫집에는 스핑크와 포시블이라는 이름의 두 노인 여성과 그들의 반려견 세 마리가 사는데, 스핑크와 포시블은 옛 반려견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시체를 박제해 집 곳곳에 전시해놓는다.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은 스스로의 나이듦과 신체의 변화 또한 용납하지 못하고, 공연하고 춤추던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목말라한다. 보빈스키, 스핑크, 포시블 모두 몸의 제약이나 훼손,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삶과 몸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개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보빈스키스핑크와 박제된 반려견들


주변에 죄다 이상한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할 때쯤, 코렐라인은 밤에만 열리는 ‘다른 세계’로 초대받고, 그가 매일 밤 현실과 ‘다른 세계’를 오가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다른 세계’에는 단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기괴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코렐라인이 그토록 원하던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다른 엄마(other mother)’가 있고, 완벽한 서커스 공연을 해내는 ‘다른 보빈스키’와 반려쥐들, 젊어져서 다시 마음껏 춤추는 ‘다른 스핑크와 포시블’, 그리고 살아있는 개 수십 마리가 있다. 코렐라인이 한창 ‘다른 세계’에 빠져들 무렵, ‘다른 엄마’는 이 ‘유토피아’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면 단추 눈을 꿰매 넣으라고 요구한다. 모두가 서로가 원한 모습이 되고 만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선 코렐라인 또한 남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재단되어야 한다.


코렐라인과 진짜 와이비 '다른 엄마'에 의해 입이 꿰메어진 '다른 와이비'


코렐라인이 단추 눈을 꿰일 두려움에 쫓기는 순간부터 점점 ‘다른 세계’의 폭력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다른 와이비’가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다른 엄마’는 코렐라인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와이비의 입을 웃는 형태로 꿰매어 버린다. 사뭇 그로테스크한 발상이지만, 영화는 ‘완벽성의 폭력’과 ‘현실의 불가피한 모자람’을 대조하기 위해 인형의 메타포를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인형은 사람과 유사하게 생겼고, 사람의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이 원하는 형태로 바꾸고 움직일 수 있다. 일방적으로 제작 혹은 해석당하며, 살아있는 대상의 존엄과 저항력을 갖추지 못했다. 폭력을 감내하는 ‘인형’이 되지 않겠다는 코렐라인의 굳은 의지와 발버둥은 <코렐라인> 속 인물들이 실제로 인형임을 고려했을 때 일종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이 불편한 아이러니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촉발하면서, 우리 또한 통제되는 삶 속에서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결말을 스포하자면 코렐라인은 결국 재미없고 성가실지언정 ‘진짜’ 사람들이 있는 현실을 선택한다. 진짜 엄마아빠는 코렐라인의 고민과 역경에 대해 변함없이 무심하고 무지하지만, 그는 힘들게 다시 만난 부모를 반갑게 안아준다. 이는 그저 “부족한 부모님이라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교훈보다는,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대신, 사랑하는 이들 저마다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흠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겠다는 다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찝찝하지만 안도하게 되는 그 정도의 정서가 <코렐라인>이 선물해주는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사람은 걷거나 눕거나 씻거나 먹으면서 그저 몸을 움직인다. 한편, 우리의 몸은 각자 다른 무게와 각도를 지닌 채 움직이고, 이 움직임이 쌓여 저마다 특정한 규칙과 루틴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스톱모션에서도 큰 함의가 없을지언정 움직임에 집중하는 장면이 많으며, 인물들의 뼈대와 동선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각 캐릭터가 마치 사람처럼 ‘습관’과 인물 고유의 움직임을 부여받곤 한다. 코렐라인은 자기 말에 도통 집중하지 않는 엄마아빠의 이목을 끌고 싶을 때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앞뒤로 밀고 당기는 습관이 있다. 코렐라인을 매번 답답하게 하는 와이비는 소심한 성격대로 어깨가 움츠려져 있을 뿐 아니라 고개가 자꾸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영화 속에서 움직임은 그저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문법으로서 존재한다.


클레이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영화 <메리와 맥스>는 이와 같은 ‘몸’의 세계를 더욱 깊이 파고든다. 영화의 주인공은 호주에 사는 여덟 살 소녀 메리로, 그는 알코올 중독자 엄마와 무뚝뚝한 아빠 밑에서 충분한 돌봄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 메리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전화번호부를 뒤져 랜덤한 중년의 뉴요커 맥스에게 편지를 쓴 것을 계기로 그들은 펜팔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면대면으로 만나지 못하지만, 국경이나 나이의 차이가 무색하게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메리와 맥스>에서 또한 인물들의 특성이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어린 메리는 이마를 덮은 점이 ‘응가 색깔’이고 주근깨가 났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다. 메리의 아빠는 고속도로에서 마주친 새들을 방부처리액으로 박제해서 수집하는 괴상한 취미를 지녔다. 한편 맥스는 불안증을 앓고 있는 고도비만의 남성으로, 일상을 통제하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어린 메리가 늘어놓는 연애 상담이나 따돌림에 대한 토로는 자꾸만 맥스의 유년 시절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방구석 모서리에 숨거나 핫도그를 36개나 연달아 먹고 더부룩함 속에서 밤을 지새운다. 결국 어느 날 맥스는 우울증과 비만으로 인해 기절해 8개월 동안 입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맥스는 메리를 놓는 대신, 메리의 편지를 끊어 읽거나 천천히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가져보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고 나서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답례로 건넨다. 그렇게 그는 메리의 상흔을 나눠 짊어지면서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간다.


영화는 몸이 있기에 생겨나는 미묘한 오해, 고통, 혹은 연결의 순간들을 정성스레 포착해낸다. 극 후반부에 가서야 맥스는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는데, 맥스가 계속해서 보여주던 몇몇 특징들이 뒤늦게 그의 아스퍼거 증후군과 연결된다. 이를테면 그는 감정을 이해하거나 표출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감정 책’을 들고 다니면서 상황에 알맞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거나 웃음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을 구겨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무표정을 유지한다. 어느 날 메리가 미소를 잘 짓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혼이 나자, 표정과 감정에 대해 오래도록 곱씹어온 맥스는 “웃지 않는 것은 괜찮아. 입이 웃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웃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이라는 답장으로 그를 위로해준다. 한편 맥스는 자신의 상태가 고쳐야 할 ‘장애물’이나 ‘결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유일한 고통은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것뿐이라고 토로하는데, 그 말을 들은 메리는 빈 유리병에 자신의 눈물을 담아 뉴욕으로 부치고, 그 눈물방울들이 맥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맥스를 위해 눈물을 모으는 메리긴장해서 방구석에 숨은 맥스


훼손과 나이듦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메리와 맥스>와 <코렐라인>은 흥미롭게 교차한다. 두 영화는 모두 다양한 노년기의 모습을 배치한다. 호주에서 메리의 가장 친한 친구는 이웃집 할아버지다. 그는 세계대전에 참여해 두 다리를 잃었고, 차에 치이거나 폭탄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메리는 늘 그의 우편을 수령해준다. 시간이 지나 메리가 삶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죽음을 생각할 때, 이웃집 할아버지는 오로지 메리가 수거하지 않은 우편을 전달해주기 위해 몇십 년 만에 문턱을 뛰어넘어 메리의 집을 찾아간다. 그 작고도 큰 행동이 메리를 살린다. 한편 메리를 알기 전까지 맥스의 유일한 친구였던 옆집 할머니는 패스트푸드와 초콜렛을 너무 많이 먹는 맥스를 위해 종종 요리해준다. 그는 이제 눈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맥스의 물건 위치와 일상 궤적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어, 맥스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집을 관리하고 반려동물들을 돌보아주기도 한다. <코렐라인> 속 노인들이 신체의 변화나 죽음을 부정하고 젊음과 완벽성에 집착하는 인물들이었다면, <메리와 맥스>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나이듦을 포함한 삶의 굴곡으로 인해서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잃었지만, 그 소실을 받아들인 채로 주변 인물들의 빈틈까지 채워낸다.


이와 같은 온도로 <메리와 맥스>는 죽음 또한 적나라하고도 담담하게 풀어낸다. 메리의 부모는 큰 갈등 없이 살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오랜 불안과 침묵이 쌓였고, 영화 도입에서 잠시 등장한 아빠의 폭력적인 취미 – 박제 – 는 미약하게나마 집안에 죽음의 기운을 들이고 늘 악몽처럼 도사린다. 그러더니 결국 메리의 알코올 중독자 엄마는 아빠의 방부처리액을 술로 오인해 그것을 마시고서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런가 하면 맥스의 이웃 할머니 또한 극 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나름 평화로운 죽음이지만 그 또한 허무하게 발생한다. 영화는 이런 죽음의 허무나 상실을 애써 포장하거나 수습하려고 하지 않으며, ‘비극적인 죽음’과 ‘호상(好喪)’을 굳이 대조하지도 않는다. 영화 속에서 총 네 인물이 사망하는데, 모든 죽음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나머지 인물들의 인생은 평소처럼 흐른다.


고통의 재현은 포르노적이거나 2차 가해가 될 위험성을 지닌다. 그런데 스톱모션은 몸을 지녔기에 인간이 감각하는 생의 그림자와 중력을 공감 가는 형태로 표현하기에 유리하면서도, 그 대상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자유롭게 적나라하거나 과장된 훼손을 표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지독한 아픔을 말하는 순간에도 그 속에 너무 침잠하지 않고 유쾌한 감정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강점을 지닌다. 허무한 죽음과 훼손 가능성을 내재한 복잡한 코미디는 비단 이 두 영화만의 특징이 아니다. 더욱 유명한 팀 버튼 감독의 <유령신부>를 잠시 끌고 오자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인 ‘Remains of the Day’는 하루의 잔해 혹은 유해로 해석될 수 있다.


죽음 죽음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

아무리 숨어도

 아무리 기도해도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어

결국엔 우린 모두 한 줌의 재

우리가 살던 인생은 잊혀지기 마련이지


어차피 죽으면 끝이고, 언젠가 모두들 잊히겠지만 아무렴 괜찮다는 해골들의 이 유쾌한 노래는 어쩐지 생이 시작된 날에 죽음을 노래하는 한국 초등학생들의 기괴한 풍습과 닮았다. <유령신부>는 즐거운 망자들과 팔뚝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시체 신부를 보여주는가 하면 눈알에 사는 구더기마저 사랑스러운 바람에 “아이들에게 죽음의 정서를 조장한다”는 거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초등학생 시절에 걸쳐 대부분의 아이들은 문득 ‘죽음’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체감하게 되면서 저마다의 우울과 혼란을 겪는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펑펑 울거나 나의 나이든 모습을 두렵게 상상하다가도, 내일 당장은 죽지 않을 것처럼 허무하게 밤잠에 빠지기도 한다. 두려움과 안도, 죽음의 그림자와 생의 감각은 이렇게 얼기설기 뒤섞인 채로 세트처럼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미 많은 밤을 채우는 이 악몽들을 함께 노래로 불러내는 것 정도야 어떠한가.














오래된, 미래

스톱모션들이 모두 개인의 아픔과 죽음의 악몽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어둠이 공존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 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하며 노래하기도 하고, 죽어가는 세계를 생각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사람의 감각에 유독 맞닿아있는 스톱모션은 ‘몸’이라는 근거지를 바탕으로 사회 정의, 탈식민주의, 혹은 집단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로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대표적으로 캐나다 원주민 스톱모션 감독 Amanda Strong의 작업물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탐험한다.


https://vimeo.com/248095181

그의 2016년 작인 <Four Faces of the Moon>은 한국인들도 공감할만한 피식민지배자 후손들의 트라우마를 담았다. 유럽계 식민지배자들이 '신대륙'의 대평원 목초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수만 마리의 물소와 수만 명의 원주민이 학살당했다. 이제는 시체들마저 사라져, 그 역사는 환영, 기억, 악몽으로만 남았다. 감독은 그 공백에 몸뚱아리를 제공한다. 12분짜리 짧은 영상 동안 원주민 여성 한 명이 땅 위를, 기억 속을 걷는다. 한 세기 넘게 운영된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들은 원주민 아이들을 전통문화와 커뮤니티로부터 분리하고 그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유럽 문화를 심어 넣으려 했다. 교복을 입고 외롭게 걸어가는 과거의 아이는 부모님께 받은 이름을 부정당하고 식민지배자들의 영어식 이름을 부여받았다. 아이는 분노 섞인 얼굴로 교회의 문을 마구 흔든다. 달빛 속에서 여성이 가득 쌓인 물소의 뼈를 응시하고, 그 뼈들이 살아 땅을 가득 뒤덮고 서로 피부를 맞대었을 시절을 상상한다. 유구한 세월 동안 들판을 거닐다가 단숨에 죽어버린 그 소들과 눈을 마주친다. 텅 빈 종이에 기억해야 할 얼굴들을 하나하나 인화하고, 물소들의 시선 앞에서 흙을 파내고 새로운 씨앗을 심으면서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vWjnYKyiUB8

한편 같은 감독의 더욱 최근작인 <Biidaaban: The Dawn Comes (2019)>에서는 젊은 젠더 논바이너리(non-binary) 원주민 주인공 Biidaaban이 만 살이 넘은 shapeshifter Sabe 과 함께 도시 한가운데에서 원주민의 전통적인 단풍나무 수액 채집 방식을 시도한다. 단풍나무 수액으로 시럽을 만드는 기술은 원주민들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도시 개발과 자본주의로 인해 죽은 문화가 되어버렸다. Biidaaban은 남의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수액을 채집하면서 처벌을 받을까봐 계속 두려워하고, 동시에 이 나무들이 누군가의 ‘소유'인지, 그 나무들을 만지고 사용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를 계속해서 질문한다. 이처럼 전통을 되살리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Biidaaban은 옛사람들을 포함해 한때 이 땅을 자유롭게 누볐던 사슴과 늑대들, 그리고 쫓겨난 모든 생명의 영혼을 보게 된다. 식민지배의 유산으로 세워진 캐나다의 골목골목에서 원주민과 자연의 역사가 아지랑이처럼 되살아난다. 백인들의 캐나다를 살고 있지만 원주민의 역사와 계보 속에서 존재하는 감독은, 산 자의 세계와 망자의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혹은 그 모든 세계를 유영하는 주인공을 통해 본인의 감각을 표출한다.




존재론적인 고찰과 생의 고통에 대한 탄식은 예술 장르를 망라하고 인기 있는 소재지만, 타 애니메이션과 스톱모션 간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의례(ritual)’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령들이 살아나고 깊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달밤에, 감독은 목소리 없는 역사에 공간과 형태를 부여하며 빙의의 의식을 거행한 것만 같다. 제작 과정의 리추얼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얼마 전 찾아본 인터뷰에서, 왜 굳이 이 역사를 거대한 세트와 인형들로 구현하고 싶었냐는 질문에 Amanda Strong은 이런 답변을 남겼다:


“저는 관객들이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가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발생한 사건임을 ‘느꼈으면’ 했어요. 그리고 팀을 꾸려 이 역사를 물리적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디지털로 구현하는 것보다 저희에게도 남에게도 큰 임팩트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 너무 많이 설명하고 싶진 않았어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길’ 바라면서 만들었어요.”


스톱모션은 만드는 사람을 뒤바꾸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물리적인 ‘몸’과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지난한 의식이다. Amanda Strong이 이 12, 19분짜리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만 각각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극 중 등장하는 물소 뼈들만 121cm 높이의 산을 이루었으며, 산 외곽에 놓일 것들만 제작했는데도 1,000개의 수제 물소 머리뼈 모형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 모든 작업은 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끔찍한 죽음의 크기를 체감하게 한다. 스톱모션은 제작 과정과 결과물 자체가 모두 삶과 죽음을 ‘체화(embody)’한다는 의미에서 강렬한 힘을 지닌다.


한편 이 작품을 중심으로 스톱모션이 삶의 연결을 도모하는 방식을 되짚어볼 만하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지녔지만 ‘살아있는 것’들 간의 연민과 본질적인 유사성을 그려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를테면 <코렐라인>에서 스스로의 노화를 부정하는 노인들이 반려동물의 죽음 또한 외면하거나, <메리와 맥스>에서 새들을 박제할 때 쓰이던 약이 결국 메리의 엄마까지 죽이는 등, 비인간 동물과 인간이 별다른 설명 없이 유사한 상황 속에 배치되곤 한다. Amanda Strong의 작품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죽임당한 물소들이 죽임당한 원주민들과 함께 추모되고, 잃어버린 전통의 아지랑이가 죽어버린 늑대와 사슴의 령과 함께 떠오른다. 심지어는 대지와 자연이 망가지고 소실되어온 역사까지도 어루만지려는 시도가 담겨있다.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해본 원주민으로서, 감독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임당한 몸들, 그 한 맺힌 영혼들을 본다. 모두 피부로 느낀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죽음을 바탕으로 다른 삶을 상상하고 다른 생명과 연결되는 모습이다. 죽음이야말로 몸을 가지고 숨 쉬는 모든 생명체를 꿰는 본질이다. 악착같은 삶과 허무한 죽음 앞에서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우리 삶의 취약성과 상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스톱모션이라는 뼈와 그림자의 세계를 택하고, 그 안에서 뼈와 그림자를 가진 모든 존재 간의 연결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인형과 인형극이 예로부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실험하고 그 연결을 탐험했듯, 그 계보에 놓인 미래의 스톱모션 또한 이 가능성을 계속해서 안고 있을 것이다.




흑, 백


                   

데생(dessin)을 할 때, 가장 밝은 빛을 받는 면 바로 옆에 가장 어두운 면이 맞닿지 않으면 붕 뜬 가짜 그림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어두운 획을 그리기를 기피하는 순간 밝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감은 잃고 만다. 어둠을 더욱 적절한 방식으로 공생시킬수록 그림은 생명을 얻는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불안은 어차피 영원히 해소될 수 없고 오히려 매 순간 삶의 변두리를 촘촘하게 둘러싼다.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의 직후에는 반동처럼 이유 모를 불안과 슬픔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삶의 그림자까지 품은 이야기들은 그 입체감으로 마음을 푹, 찌르고 오래도록 몸을 도닥여준다.


내가 어릴 때 내 장래 희망은 내가 아닌 사람이었어.

모든 사람의 삶은 긴 도로라서 잘 포장된 곳도 있고 내 경우처럼 깨진 곳도 있대.

너의 길은 내 것과 비슷한 모습일 거야. 조금은 덜 깨져있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래, 단점들까지도...

그 단점들은 우리가 고른 게 아니야. 우리의 일부야. 함께 살아가야만 하지.

하지만 친구는 고를 수 있어.

내가 너를 용서하는 이유는 네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야.

나도 완벽하지 않아, 모든 인간이 완벽하지 않아.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고 하나밖에 없는 친구야.

널 고를 수 있어 난 기뻐.


- 영화 <메리와 맥스> 중 맥스의 대사 -


몸은 언제나 가장 지독한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다. 몸이 있어 아프다. 몸이 있어 죽는다. 몸이 있어 못생겼고, 부족하고, 완벽하지 못하다. 몸이 있어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몸이 있어 초콜렛의 달달함을 알고 햇살의 따스함을 안다. 몸이 있어 남을 상상하게 되고, 몸이 있어 죽임당하는 모든 생명을 생각하며 눈물 흘린다. 몸이 있어 사과하고 용서할 수 있다. 몸이 있어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


분리된 각자의 몸속에서, 우리는 종종 부족한 자신을 혐오하기에 남을 용서하거나, 남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스톱모션은 몸을 가진 존재, 혹은 생을 가진 몸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형형하게 재현하지만, 결국 스톱모션이 담아내는 그림자는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빛과도 연결된다. ‘나’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 속에 홀로 갇혀있지만, 분리와 유한성이 자아내는 두려움으로부터 타인과의 연결이라는 갈망이 태어나고, 우리는 비로소 맞닿는다. 참 모순적이고도 다행스러운 동행의 가능성이다. 잔혹한 세상과 어쩔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의 틈에서, 스톱모션은 그 정도의 은은한 가치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흑백 영화 <메리와 맥스>에서 인물들이 상처를 나누고 서로를 보듬을 때만 쏙 등장하는 빨간색 활기처럼, 스톱모션의 세계는 흑과 백의 모순과 교차로 태어나는 무언가를 품어낸다.


흑과 백.

빛이 있어야만 태어나는 그림자, 그림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광명하는 빛.

그러니 우리는 이따금 그림자와 함께 춤을,





편집위원 노랑 (raryoo6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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