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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문예학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물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공고한 사회 내 위계 속에서 지배계급에 종속되는 하층민을 통칭하는 용어인 서발턴(Subaltern)은 스피박에 의해 계급, 계층, 인종, 젠더를 아울러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있었다. 서발턴, 즉 사회 하층민이 말할 수 있냐는 물음은 그저 그들이 혀를 굴려 입 밖으로 언어를 소리 낼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창작하는 자기 서사가 진정 사회에 반영되는가를 의심하는 물음이다. 한 개인이 서발턴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를 둘러싼 수많은 정체성과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누가 서발턴이고, 누가 서발턴이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누가 서발턴인지를 진단하기보다 어떤 상황이 나를 서발턴으로 만드는지, 즉 내가 진정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존재인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말하기 혹은 글쓰기에서 기인하는 감각을 먼저 말하고 싶다.

 

0. 나의 글쓰기: 번민하는 글쓰기

 

    때때로 말을 하고 글을 쓸 때마다 나의 언어들이 공중으로 파스스 사라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술집에서 벌건 얼굴로 발포한 나의 진정성은 그저 이산화탄소가 되어 공기 중에 녹아든다. 말을 고르고 골라 올린 인스타그램 속 스토리는 24시간이 지나면 공중분해 되어 나의 보관함 속에 처박힌다. 결연한 얼굴을 하고 타닥타닥 자판을 치면서 완성된 블로그 속 글들은 그저 나의 습작이 되어 컴퓨터 공간 한 귀퉁이에 널브러져 있다. 낙태죄 합헌을 기념하기 위해 감격에 젖어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그랬고, 맥주를 마시며 N번방을 중얼거리던 어느 새벽의 흐느낌이 그랬고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불발된 날, 짙은 우울과 권태에 젖어 적어 내려간 나의 블로그 속 포스팅이 그랬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명제에는 공감이 가는데 어째 그 변화 속 나의 공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리 말해도, 결국엔 말할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외딴곳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연신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는 것이 이젠 지난했다. 상대와 라켓을 쥐고 테니스공을 번갈아 치는 것이 아니라. 절대 부서지지 않을 벽을 앞에 두고 혼자 끊임없이 공을 때려대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내가 지난날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 마음 깊이 반성했고 어리석었다고 인정했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때론 뿌듯해하고 감격하기도 했다. 아주 천천히 나아가는, 때론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닌가 싶은 사회 속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오로지 나였고, 나만이 내 목소리를 받아적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엔 내 글이 우쭐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가, 때로는 찢어발기고 싶을 만큼 어설프게 느껴졌다. 이런 훌륭한 글이 그저 몇 명에게 읽히고 잊힌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다가도 이따위 글을 쓰고 타인에게 읽혔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자아도취와 자기 혐오의 극단 속에서 비틀대며 나는 열성을 다해 글을 썼고 그 글을 다시 읽었으며 다시 고쳐 썼다. 나의 아웃풋을 다시 나의 인풋에 구겨 넣어 더 나은아웃풋을 산출하는 과정은 더욱 견고한 나를 만들어 나의 자기 됨을 완성했을지 몰라도 무엇보다 나를 외롭게 했고 지치게 했다. 말 그대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비틀대던 나는 올해 한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소설에 빠져있었다. 그때 나의 애정은 빠져 있었다는 상투적 표현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틈이 날 때마다 비평을 읽고, 작가와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를 보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사랑한 두 작품에는 글을 쓰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또 그 두 작품을 쓴 여성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레타 거윅과 그가 감독한 영화 작은 아씨들[각주:1], 윤이형과 그의 소설 붕대 감기[각주:2], 두 작품 내외에 등장하는 여성의 글쓰기를 탐구하고자 한다.


1. 『작은 아씨들밖 그레타 거윅: 오명을 씻는 글쓰기


    미국의 감독이자 배우인 그레타 거윅은 수많은 사람에게 읽힌 고전 소설이자 이미 여섯 차례나 영화화된 적이 있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2019년 또다시 영화화하면서 스스로가 이 일에 그야말로 적격인 인물이었다고 자신한다. 그의 호기로운 발언을 증명하듯, 영화는 원작의 커다란 줄거리를 토대로 이전엔 찾아볼 수 없었던 활력과 생동감을 더한다. 기존 소설과 영화들이 마치 가()의 둘째 조 마치를 중심으로 네 자매의 생활과 그들의 가족,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린 목가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그쳤다면 거윅은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조와 에이미, 그리고 그 둘의 미묘한 관계에 집중한다.

 

    거윅이 작은 아씨들을 통해 이뤄낸 가장 거대한 업적 중 하나는 많은 이로 하여금 에이미 마치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한 것일 테다. 작은 아씨들에서 에이미 역을 연기한 배우 플로렌스 퓨는 자신의 역할이 에이미 마치임을 알릴 때면 지인들의 안타까운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고 말한다.[각주:3] 플로렌스 퓨의 말대로, 기존의 작은 아씨들속 에이미는 늘 모두가 싫어하는 그런 애에 불과했다. 작중 누구보다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면서 그림 공부에 매진하는 인물임에도 말이다. 철부지 막내, 혹은 조의 유럽 여행을 가로챈 장본인이자, 조와 로리의 애정선 속 방해꾼 정도로 묘사되는데 그쳤던 에이미의 오명을 지우고 예술가로서의 에이미의 삶을 재조명한 것은 다름 아닌 거윅의 작은 아씨들극본이었다.

 

    거윅은 감탄한다. 이 야망으로 가득한 19세기의 소녀가 얼마나 멋지냐고 말이다. 여태껏 화려한 금발의, 철부지 막내 여동생으로 묘사되던 에이미는 비로소 거윅의 글을 통해 총명한 야심가이자, 작가인 언니 조만큼 화가로서의 예술적 재능을 펼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실력의 한계에 낙담하면서도 위대해지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를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에이미는 조에 버금가는 예술가의 혼, 열정을 가지고 있다. ‘여성에게 결혼은 경제적인 것이라는 명제에 어깨를 으쓱하는 로리에게, 결혼이 경제적이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라며 경제적 활동에서 일체 배제되는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에이미는 여성에게 고정적인 소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연상케 한다.

 

    영화를 감상한 이들은 자신이 상상해온 바와 다른 에이미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을 테다. 어떻게 에이미를 그토록 신선하게 재해석했냐는 물음에 거윅은 태연하게 말한다. “에이미가 말하는 모든 대사가 책에 그대로 실려있었던걸요!”[각주:4] 당연한 대답이지만 왠지 모르게 섬찟하다. 조를 유일한 여자주인공으로 추켜세우는 기존 작법에 의해 에이미의 삶의 맥락은 모조리 삭제되었다. 그러니 에이미는 그저 조와 달리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심지어 언니의 애인을 빼앗는여동생이 되고 말았다. 여성이 남성과 결혼으로 관계 맺음할 때 그 남성의 경제 능력은 일 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동시에 자신은 예술가로서 성공하길 바란다고 되뇌는 에이미는 사실 원작인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역시 호흡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여섯 차례나 무시되었던 에이미의 기개와 자기주장, 예술성은 거윅의 글에서 비로소 조망된다. 그는 조만큼이나 야망 있고 성공을 열망하는 여성이었지만 동시에 조와 달리 여성으로서의 직업적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한 이였다. 따라서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 가장 안정적이고 당연한,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자매들과 함께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거윅의 새로운에이미는 조와 에이미의 관계 묘사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저 주인공인 조의 삶 속 엑스트라 혹은 방해꾼으로 묘사되던 에이미는 거윅의 글에서 조와 진취적으로 관계 맺는 인물로 등장한다. 조는 막내인 에이미를 때때로 못마땅해하며 그 앤 힘든 일을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다며 비아냥대지만, 본래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던 대고모와의 유럽 여행을 에이미가 대신 가게 되자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미묘한 감정을 겪는다. 대고모가 조에 약속했던 유럽 여행은 조가 대고모를 태만하게 대함으로써 취소되었고 그 기회는 조와 달리 성실하게 대고모를 대접했던 에이미에게 돌아간다. 여행을 다니며 그림 공부를 하다가 종국엔 사랑까지 쟁취하는 에이미에 대해 조는 애정도, 질투도, 유대감도, 부러움도 느낀다. 에이미 역시 조의 직업적 성공을 응원하면서도 똑똑하고 얄미운 제 언니 조가 아니꼽다. “조는 뉴욕에서 작가가 됐는데 나는 실패작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그려왔던 그림들을 치우는 에이미의 얼굴에는 조에 대한 감탄과 열등감, 사랑과 낙담이 뒤섞여 있다. 이처럼 주인공인 조를 중심으로 에이미를 그저 세속적인, 허영 가득한 막내로 묘사해왔던 기존 작법과 달리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에이미를 야망 있는 여성 예술가로 그려냄으로써 조와 에이미 간의 관계를 팽팽한 줄다리기로 묘사한다. 거윅의 글쓰기는 에이미가 지금껏 뒤집어쓰고 있던 오명을 걷어냄으로써 보다 입체적이고 단선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충실히 구현할 수 있었다.

 

2. 붕대 감기밖 윤이형: 인공호흡 하는 글쓰기

 

    윤이형의 소설 붕대 감기속 등장인물들은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하다. 소설은 마인드맵이 끝없이 이어지듯 여성들의 끝없는 관계를 연결한다. 이를테면, A가 어딘가에서 만난 BC라는 친구를 가지고 있고 C는 사실 이전에 DE를 인터뷰한 적이 있으며, E의 어머니 F는 동료 여성 G와 함께 살고 있는, 그런 식이다. 소설은 그렇게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삶에 맥락을 덧붙이고 그들을 설명하는 과정을 수려하게 해낸다.

 

    『붕대 감기에서 붕대는 소설 속 등장인물인 진경과 세연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물이자, 윤이형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대체어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페미니즘인데, 그걸 붕대라고 한다면 사람에 따라 좀 답답할 수도 있고 너무 세게 조이거나 잘못 감으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할 거예요.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상처와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 가는 것이니까 붕대 자체는 필요한 것 같아요.”[각주:5]라고 말하며 작품에 대한 설명을 마친 윤이형은 단순히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여성들의 삶이 서로 교차하여 붕대 감는 모습을 작품 내내 묘사한다.

 

    윤이형은 붕대 감기라는 작품이 지닌 목표에 대해 페미니즘 담론의 장을 지켜보며, 담론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여성이 많음을 느꼈어요. ‘담론 바깥의 여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각주:6]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 소설을 통해 그야말로 담론 바깥에서 서성이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또한, 지금껏 납작하게 압축되어왔던 다양한 여성들의 삶에 입체성을 불어넣는다. 달리 말하면, 윤이형의 붕대 감기에서는 항상 피동적으로만 묘사되었던 인물들이 드디어 주체가 되어 자신을, 자신의 삶을 소리 내어 말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속에서도, 심지어 페미니즘의 지형 속에서 말할 힘을 갖지 못해 맥없이 축 늘어져 있던 사람들은 윤이형의 글쓰기를 통해 호흡과 언어를 갖게 된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지현은 불법 촬영 규탄 시위에 참여하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미용 시술이 여성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는 탈 코르셋의 논리 속에서 헤어 디자이너라는 자신의 직업이자 성취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한다. 형은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채이 곁에서 함께 싸우면서 자신과 같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는 여성주의 운동 선배들을 우아한 말만 할 뿐”(110p)이라며 폄훼한다. 또한, 이후 경혜와 채이를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와 크고 작은 다툼을 겪고 이내 모두와 연락을 끊는다. 모두와 척을 지면서 형은은 가부장제와 싸우고 여성주의자들과 싸운다. 유자녀 기혼여성들 역시 다양하게 묘사된다. 은정은 아들 서균을 출산하고 커리어 단절을 막기 위해 육아 등의 가사와 회사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다가 자신이 회사 일도, 육아도, 인간관계도 모두 놓치고 있었다는 자괴감으로 일상이 얼룩진다. 또 다른 유자녀 기혼여성인 진경은 딸 율아를 출산한 이후 방과 후 독서 교사로 일하면서도 자신과 가사 일과 육아 등이 반()여성주의적이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렇듯 윤이형은 기존의 텍스트들이 충실히 구현하지 않았던, 따라서 그저 엑스트라로 치부해온 인물들의 삶을 쓴다. 페미니스트라면 으레 숏컷에 무채색 옷을 입고 화장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기혼 유자녀 여성들과 미용 업계 종사자들은 가부장제에 부역하고 있다는 비난, 모든 여성주의자는 일체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시스터후드를 발휘하고 무조건적으로 연대할 것이라는 기대는 그의 글쓰기를 통해 산산이 조각난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묻는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가부장제가 페미니즘 담론 속 확인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그렇게 모든 검열을 통과한 진정한 페미니즘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하지만 무척이나 현실적인 인물들의 언어를 빌려 자신의 글쓰기를 계속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108~109p)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이잖아.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말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걸까? 의제 하나에 쌍둥이처럼 집회가 두 개씩, 그것도 동시에 열리는 게 너는 바람직해 보여? 나는 부조리해 보이는데. 언제까지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을 하지? 우리는 서로의 대립 항이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왜 중요하지 않아?” (146p)

 

    채이는 형은에게 우리의 페미니즘이 같아질 필요가 없다며 위와 같이 말하지만, 이는 사실 윤이형이 채이의 입을 빌려 자신의 페미니즘, 즉 자신의 붕대 감기를 말하는 것일 테다. 모든 검열을 통과하여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저 페미니즘을 획일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되물음. 나의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타인의 페미니즘을 부정하고 비난하여 그와 대립한다면 그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것이라는 외침. 이렇듯 윤이형의 글쓰기는 지금껏 문단 내 가부장적 권력도, 여성주의적 흐름도 주목하지 않은 페미니즘 주변부여성들의 삶을 붕대 감기속에서 묘사함으로써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언어를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대립 항이 되기 위해 우리가 여성주의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채이의 얼굴은 어쩐지 앞서 등장한, 타인에게 붕대를 감을 땐 엄격하거나 단죄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 윤이형의 언어와 겹쳐지는 듯하다. 이는 아마도 채이를 비롯한 붕대 감기속 모든 등장인물이 윤이형의 인공호흡을 통해 윤이형의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붕대 감기속 경혜: 연대와 좌절의 글쓰기

 

    『붕대 감기속 경혜와 채이는 각각 대학교수와 대학생이라는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친구라는 관계로 발돋움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나가던 우정의 역사는 ‘A 교수의 성추행이라는 사건으로 지지부진해진다. 경혜가 천, 그러니까 가해자인 A교수의 대학 선배였다면, 채이는 천이 자신에게 저지른 성폭력 가해를 대자보로써 고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경혜와 채이는 나이와 직업에서 파생되는 위계들을 뛰어넘으면서 우정을 쌓지만 그렇게 견고하던 관계는 채이가 대자보를 게시하고 경혜가 채이에게서 A교수가 천임을 확인받으면서 뒤틀린다. 채이가 학생회관 앞에 붙인 대자보는 오래지 않아 뜯겨 나가고 천은 곧바로 채이를 고소한다. 핼쑥해진 얼굴을 한 채이는 경혜가 데려간 변호사 사무실에 앉아 경혜에게 묻는다. 경혜가 격주로 연재하는 일간지 칼럼에 천의 이야기를 고발해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러나 채이가 자리를 잠시 뜬 사이에 변호사는 고개를 젓는다.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실명을 안 쓰셔도 놈은 고소해요. 교수님을 고소하는 게 아니고 저 친구를, 채이 씨를 또 걸 거예요. 민사로, 교수님에겐 손끝 하나 대지 않겠지만 저 친구를 두 배로 세 배로 괴롭힐 겁니다. 오직 저 친구만 괴롭힐 거예요. 남초 사이트를 이용해 여론을 뒤집고 악성 루머를 퍼뜨릴 거예요. 최근 들어 종종 나타나는 패턴이에요. 위협으로가 아니라, 죄책감과 무력감이 들게 해서 연대자가 스스로 연대를 그만두게 만들고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겁니다. 불기소가 날 확률이 높으니 그냥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103-104p)

 

    자신의 글쓰기가 도리어 채이를 해할 수 있다는 말에 경혜는 인내한다. 그렇게 그는 경직된 상태로 천천히 고립된다. 천을 위한 탄원서에 연명을 부탁하러 찾아온 동료 교수들은 경혜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중에서 부유하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를 인내 끝에 경혜는 마침내 글을 쓴다. 이름 없이, 천에게 보내는 격문을 써서 학생회관 벽에 붙인다. 채이의 대자보가 뜯겨 나간 자리에 붙인 경혜의 글은 역시 금방 뜯어지지만, 곧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익명으로 작성된 글에서 용케 경혜를 읽어낸 사람들은 그를 투사 취급하면서 경혜의 옛 저서를 문의하고 그에게 원고를 청탁한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채이는 트위터에서 유명해졌을 뿐, 공황 증세로 휴학계를 내고 병원에 입원해있는데 말이다. 채이의 절친한 친구인 형은의 SNS에서 언니의 고통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영광이 된다.”는 글을 발견하고 나서야 경혜는 자신의 글을 되짚으며 자문한다.

 

이 글 어디에 그렇게 내가 많이 들어있는가. 나는 채이의 부탁을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썼는데, 이 분노에는 채이의 고통이 아니라 빨리 죄책감을 벗고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내가 더 많이 들어있었던 건가? 써도 힘들어지고 안 써도 힘들어진다면, 나는 쓴다는 행위로 나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했던 건가? (105p)

 

    채이가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던 경혜는 채이와의 연대를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글은 경혜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비겁한 글이 되고 말았다. 피해를 호소하는 자신의 친구는 일상 영위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병원에 입원해있는데 고작 피해자의 친구로서, 가해자의 지인으로서, 대학의 교수로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자신의 글은 피해자의 글을 뛰어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은 모두 경혜의 글쓰기에서 비롯된 것이나 다름없다. 연대를 위해 시작된 글은 결국 좌절로, 비겁으로, 부끄러움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경혜의 글쓰기가 그러했다.

 

4. 붕대 감기속 세연: 붕대 감는 글쓰기

 

    『붕대 감기에는 수많은 여성과 그 여성들이 맺은 관계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중심 줄거리는 진경과 세연의 관계 맺음을 공전(公轉)하며 이어진다. 고등학교 동창인 두 사람은 교련 시간에 우연히 짝이 되어 서로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주면서 친구가 된다. 하지만 이내 세연은 한때 고등학교, 대학교 내내 절친한 친구였던 진경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세연과 전혀 다른 궤적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진경과의 거리를 느낀다. “왜 저렇게 남자가 없으면 못 사는 거야, 창피하게.”(135p) 라고 생각하게 하던 제 친구가 이제는 아이가 어릴 때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만나자는 자신의 약속을 계속 거절하는”(140p) 것을 지켜보면서 세연은 서서히 진경과 자신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세워지고 있음을 절감한다. 그렇게 진경과 세연, 둘의 관계는 드문드문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마는 SNS 친구로 전락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랜서 편집자인 세연에게 글쓰기의 기회가 주어진다. 우정의 책이라는, 거창하고도 막연한 이름을 단 책 출간에 참여하면서 세연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여성주의라는 문단 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고 싶은 개인적 욕망과 우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딸려오는 진경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세연의 건강을 천천히 갉아먹는 것이다. 건강이 문제라면, 늦게라도 건강을 회복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는 편집자의 간곡한 설득에 세연은 고백한다. “우정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책을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151p)

 

    우정의 책. 우정에 대한 원고를 써내야 하는 세연은 자신이 갖고 있던 진경에 대한 미움을 찬찬히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되짚던 세연은 마침내 진경에 대한 미움이 다름 아닌 자기 혐오에서 기인했음을 깨닫는다.

 

   결혼했으면, 남편과 아이가 있으면, 좋은 것들을 다 가졌으면, 내게 내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면, 너는 외롭지 않아야 하잖아. 나는 네가 부끄러워. 네가 좋아하는 분홍색이 부끄럽고,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귀걸이가 부끄럽고, 내가 사랑하던 너의 문장들이 이제는 부끄러워. (중략) 자신이 예전에 가졌던 얼굴을, 외로움을, 단단하지 못한 마음을, 세연이 혼자 오랫동안 노력해 극복했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여전히 갖고 있는 진경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곳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잊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진경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141p)

 

    세연은 과거의 자신이 통과해낸 철 지난여성주의적 고민을 겪어내는 진경의 모습에서 지난날 번민들에 고통스러워하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진경이 선택한 아내로서의, 엄마로서 삶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조소하면서도 그러한 정상성을 획득하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혐오를 발견한다. “좋은 것들을 다 가졌”(141p)는데도 행복하지 못한 진경을 부끄러워하는 세연의 심리 기저에는 남편과 아이, 안정적 가정과 아내로서의 정체성을 좋은 것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좋은 것을 성취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서성이고 있다.

 

    진경은 어떠한가. 그 역시 세연 앞에서 유독 위축된다. 진경은 세연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자신의 SNS 장문 포스팅에 댓글을 남기지 않는 세연을 발견하고 이내 자연히 자신이 올바름과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알았”(61p)다고 고백한다. “이제 세연에게는 진경과 나눈 시간보다 올바름이, 자신들의 원칙이 더 중요했다.”(61p)고 되뇌는 진경의 심리에는 자신의 삶이 세연과 공유했던 올바름에서 탈주했다고 느끼고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진경 역시 세연의 올바른삶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다가도 독신으로 외로이 사는 세연의 삶을 연민하기도 한다.

 

    이처럼 진경과 세연은 각기 다른 서로의 삶을 끊임없이 곁눈질하면서 때로 자신의 삶에 대한 우월감에 도취하였다가, 서로가 자신의 삶을 깔보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항변하고 싶지만, 번번이 그 기회를 놓치며 관계 속 우울감에 잠식된다. 진경에게는 그저 자아실현의 도구인 것 같은 글쓰기가 세연에게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독신인 세연의 자유로운 삶은 이제 진경에게 꿈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처럼 점점 벌어지는 감정의 괴리와 대화 단절로 야기되는 문제 속에서 그들은 가까스로 만나 대화한다. 세연이 청탁받은 우정의 책원고를 쓰기로 마음먹고 난 직후다. 마침내 만난 진경과 세연은 사실 그들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서로의 삶 역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각자의 삶을 각자의 것으로 두지 않고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우월감과 좌절감의 굴레 속에서 빙빙 회전하던 두 사람의 관계에는 마침내 세연의 글쓰기로 붕대가 감긴다.

 

5. 작은 아씨들속 조: 이름을 되찾는 글쓰기

 

    『작은 아씨들속 조는 영화 내내 글을 쓴다. 영화는 작가이자 글쓰기 선생으로서의 조와 그의 유년 시절을 교차적으로 구성했지만 조는 영화 곳곳, 언제 어디서든 항상 펜을 들어 글을 쓰고 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글쓰기에 매진하든, 틈날 때마다 다락방에 앉아 소설을 쓰든 조는 늘 뻐근해진 손바닥 근육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눈을 굴리고 원고지 위에서 바삐 손을 움직인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것을 자매들과 무대에 올리는 것이 즐거워서 시작되었던 조의 글쓰기는 생업이 되어 더는 즐거움만을 충족하기 위한 취미에 머무르지 못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글은 팔리지 않는 글이라는 것을 깨달은 조는 언젠가부터 살인 소설, 추리 소설 쓰기에 몰두한다. ‘스릴과 서스펜스가 있어야만 잘 팔린다, 창작의 경제학을 깨달은 것이다.

 

    조는 자신의 이름을 소설에 적지 않는다. 이따금 소설을 팔기 위해 출판사에 가거나 동료에게 글을 보여줄 때 그는 익명, 또는 제삼자를 운운한다. “피가 너무 많이 나오는 소설을 어머니가 싫어하기 때문에 익명으로 활동한다고 말한 조의 얼굴에는 초조가 짙게 배어있다. 스릴 또는 추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동료에게 셰익스피어도 대중을 위해 글을 썼다며 자신의 글쓰기를 정당화하면서도 동시에 칭찬받기 위해 굶을 여유가 없다고 화를 내는 조의 불안한 모습은 하고 싶은 글쓰기해야 하는 글쓰기속 충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 매몰되었던 조의 글쓰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뉴욕에서 애써 추리 소설을 써내던 조는 성홍열을 앓는 여동생 베스를 간호하기 위해 고향인 매사추세츠로 향한다. 고향에서 마주한 베스는 병환에 지쳐 수척하지만 애써 기운을 내어 묻는다. 왜 이전에 쓰던 글들은 더 쓰지 않느냐고 말이다. 조는 내 이야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베스는 날 위해 써달라는 말과 함께 그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베스의 간호가 끝나고 나서야 조는 자신이 쓰고 싶은 글, 베스가 좋아한 글들을 떠올리며 이내 펜을 잡아 자신과 자매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미 썼던 모든 글을 모닥불에 불태우면서 펼친 노트의 첫머리는 이러하다. “베스를 위해.” 조는 마침내 익명이 아닌 자신의 이름 조 마치를 내걸어 소설을 출간한다.

 

    자신에게 예술적 천재성이 없다며 낙담하는 에이미를 위로하던 로리는 한 질문을 던진다. “천재로 불리는 여자가 있긴 해?” 고심 끝에 에이미는 브론테 자매?” 하며 의심 섞인 얼굴로 대답한다. 그게 다냐며, 천재를 정하는 건 남자들이기에 남자들은 예술적 경쟁자를 쳐내기 위해 여성들을 천재로 호명하지 않았다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꽤 흥미롭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쳤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천재로 불릴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불릴 만한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 예술가 중 브론테 자매만이 천재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여성은 예술가가 될 수 없었고, 설사 예술가가 되더라도 그 창작 행위에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 없었다. 마치 익명으로 출간될 추리 소설 쓰기에 매진하던 조처럼 말이다. 그들의 예술은 대부분 고귀할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를 요구받았고 따라서 그들은 마치 수식을 처리하는 컴퓨터 마냥 그들의 자기됨을 잃은 채 돈이 될만한, 팔릴 만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익명으로 말이다. 그러니 피가 너무 많이 나오는 글을 쓰고 그 글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던 조가 조 마치의 이름으로, ‘조 마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교롭고 절묘하다. 그의 글쓰기는 이름을 되찾은 글쓰기인 셈이다.

 

    영화 내내 자매들을 괴롭히던 지독한 가난은 영화 후반부가 되자 손쉽게 해결된다. 근처에 살며 왕래하던 대고모가 사망하면서 그들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기기 때문이다. 호화로운 집을 거닐면서 자신들의 한층 더 부유해질 미래를 그리던 자매들은 이내 조의 글쓰기에 대해 말문을 튼다. 타인의 논리로 자신의 글을 불안하게 정당화했던 과거와 달리 조는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만의 글을 쓴다. 하지만 불안함은 여전하다. 선택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조의 마음을 들쑤신다.

 

    『작은 아씨들집필과 씨름하며 결국 원고 계약까지 해낸 조는 상심에 젖어 말한다. 여자들만 나와 투닥대고 웃는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두겠냐는 것이다. 자신의 글을 자조하며 그런 글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조에 에이미는 말한다.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 조는 즉각 반박한다. 글쓰기는 중요함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그 말에 에이미는 어깨를 으쓱한다.

 

내 생각은 달라. 계속 써야 중요해지는 거야.”

 

    지금껏 중요한 것들만이 쓰여온 게 아니라, 쓰였기 때문에 그것들이 중요해졌다는 에이미의 말은 꽤 의미심장하다. 에이미의 단단한 메시지는 표면적으로 조에 건네지는 에이미의 말이지만, 붕대 감기속 경혜와 세연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붕대 감기를 쓴 작가 윤이형에게, 작은 아씨들의 감독이자 극본가였던 그레타 거윅에게, 나아가 나를 비롯한 모든 여성에게 다가가는 말이기도 하다.

 

6. 우리: 쓸 수 있기 위해 써야 하는 글쓰기

 

    『작은 아씨들붕대 감기는 각각 180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와 2010년대 대한민국이라는, 각기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작은 아씨들속 단호한 얼굴로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에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하고 소리치다 이내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하고 얼굴을 감싸던 조는 붕대 감기에서 자의로 비혼 프리랜서가 되었지만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친구에게서 정상성을 읽어내고 종국엔 외로움을 느끼는 세연의 얼굴과도 닮아있다. 병환에 헐떡이는 베스에게 끝까지 싸워달라며 애원하는 조의 목소리는 A교수 성추행이라는 구체적 사건에 저항하는 채이와 경혜에게 건네는 응원의 메시지를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A교수 성추행 사건과 그로 야기된 일련의 사건들에 좌절한 두 사람에게 조는 싸워. 얌전히 가면 안 돼. 싸워줘.”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억지로 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 거야.”(158p)라는 세연의 말 속에 드러나는 그의 결연함은 결국 각자의 삶과 커리어를 인정하고 응원하는 조와 에이미 모두에게 닿는다.

 

    무엇보다 이들은 엇비슷한 얼굴을 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태만과 게으름은 없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발하고자 한 형은도, 그런 형은을 위해 가만히, 그저 가만히 정체하던 경혜도, 자신의 우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연도 자신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글을 쓴다. 언제 어디서든 펜을 잡고 글을 쓰고 있는 조는 두말할 필요 없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그레타 거윅과 윤이형, 두 여성의 글쓰기 속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우리의 역사는 왜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아서 이렇게 흩날리기만 하죠? 왜 우리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서 항상 우리뿐인데요? 아무도 우리에게 힘을 주지 않으니까 우린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경쟁할 것도 고통밖에 없잖아요.” (111p)

 

    ‘우리들의 기록되지 않는 역사에 울분을 토하던 붕대 감기속 형은이 떠오른다. 이는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말을 할 때마다 감각한 좌절과도 맞닿아 있었다. 고심하여 써 내려간 글이 종국에는 허공에서 나부끼다 못해 자음과 모음으로 흩날리는 느낌. 형은의 분노 섞인 질문에 선배들은 시간이 지나야 해. 서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일에는 시간이 걸려.”(111p)라고 말하지만 형은은 그것을 그저 꼰대짓으로 이해한다.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을 왜 쓰고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할 때가 있었다. 나와 나의 친구들만이 고립되어 애쓰고 있다는 감각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못할 것이라는 때 이른 좌절에 몸서리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기 혐오와 무력감이 온몸에 수채화처럼 번졌다. 하지만 붕대 감기속 형은의 우리의 말은 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흩날리는 것이냐는 질문은 작은 아씨들속 에이미의 답변으로 갈무리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을 글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였기 때문에 중요해졌다는 말. 그렇기에 우리는 고되더라도 꾸준히 글을 쓰고 말해야 한다는 것. 뻔한 소리 따위로 들리는, 모호한 이 말은 모호한 만큼이나 정답이 될 수 있다.

 

    서두에 던졌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서발턴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사람들은 결국 말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지만, 에이미의 말은 서발턴으로 호명되는 우리가, 그리고 서발턴에 포섭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써야 할지를 넌지시 가리키는 것 같다. 중요했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씀으로써 중요해진다는 말.

 

    우리는 쓸 수 있기 위해 써야 한다.



글 편집위원 빙봉(soobinlee@yonsei.ac.kr)



  1. Gerwig, G. (Director). (2019). 작은 아씨들. Sony Pictures Korea [본문으로]
  2. 윤이형, 『붕대 감기』, 2019, 작가정신 (이후 인용은 본문 속 해당 글의 소제목과 페이지만 표기) [본문으로]
  3. SiriusXM, “Florence Pugh Refused to Play Amy as a Villain in ‘Little Women’, 2020.01.08. https://www.youtube.com/watch?v=CqHIHgPodYM&feature=youtu.be (검색일자 2020.08.11.) [본문으로]
  4. 나원정, “'작은 아씨들' 소설 vs 영화 "1868년 女원작자 성공 녹여냈다”, <중앙일보> 2020.02.19. "https://news.joins.com/article/23709541 (접속일자 2020.09.06.) [본문으로]
  5. 최재봉, 「“답답하거나 아플 수 있지만... 붕대는 더 자유롭고자 일시적으로 감는 것”」, <한겨레>, 2020-01-17,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24781.html (접속일자 2020.08.11.) [본문으로]
  6. 김유태, 「‘붕대 감기’ 출간한 소설가 윤이형 “여성은 여성에게 타인일 수 없다”」, <매일경제>, 2020.01.27. (접속일자 2020.08.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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