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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리동은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행정동이자 법정동이다한강나루에 가까워한양에 소금을 공급하는 배를 타고 온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어 소금마을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서울 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 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북아현동 재개발로 한창 시끄럽던 시기에 염리동에서도 주민 퇴거가 이루어졌다재개발 지구로 지정된 염리동 남부에는 지금 주민 이주가 거의 다 이루어져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텅 빈 조용한 골목에 벽화들만이 남아 있어사진 찍는 취미가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야기

 20171월 어느 날 인사동에서 사진작가 선생님을 한 분 뵈었다. 선생님께 내 염리동 사진을 한 장씩 천천히 보여드리자, 선생님께서는 첫 말씀으로 "염리동에 왜 갔느냐"는 물음을 먼저 물으셨다. 생각해두지 않은 질문이어서 답을 찾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 사라져버린 마을 골목길 속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좋았고 그걸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대답은 선생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리지 못했다. 선생님은 자기 감상 속에 깊이 빠져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현장의 현실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말씀과 함께, 몇 가지 표현상의 도움말을 주셨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진인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머리에 오래 남아 나는 섣달그믐이었던 127일 저녁에 카메라를 다시 메고 염리동을 찾았다. 나는 원래 투쟁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 SNS에 올렸을 때 사람들 시선을 잘 끌어당길 수 있고, 무슨 쟁점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 사진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을 찍으려고 늘 노력했었다. 염리동에 처음 카메라를 들고 갔던 201610월에는 그런 사진을 찍을 생각이 없었다. 그 시기에 나는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는데, 활동을 잠깐 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완전히 그만두겠다는 생각이었다. 염리동에서 내가 찍고 싶었던 건 예쁜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 사촌들과 함께 놀았던 옛집이 있는 골목을 다시 거닐며, 곧 다시 볼 수 없게 될 고향 같은 곳을 마지막으로 기억할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기억/꿈

꽤 나이를 먹어서까지도, 나는 여덟아홉 살짜리 어린 아이가 되어 명절에 사촌들을 만나 놀 생각에 한껏 들뜬 기분으로 염리동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꿈을 이따금 반복해서 꾸었다.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이대입구 사거리에서 꺾어져 내려가다가 골목으로 접어들면, 급격한 내리막길을 한 블록 내려갔다가 시장길을 가로질러 다시 급격한 오르막길을 한 블록 올라갔다. 여기까지는 늘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차에서 내리면 오른편으로 해서 축대와 난간이 있는 오르막길을 꺾어져 걸어 올라갔던 것 같은데,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면,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과, 골목길 풍경의 막연한 이미지들이 뒤섞여 상상 속의 골목길을 새로 구성해냈다. 꿈속에서도 나는 거기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길을 밟는 느낌은 기묘했다. 환상 속의 골목길은 실제보다 훨씬 길었고, 골목길의 향취를 즐기며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작은아버지네 삼층집이 나타나면서 꿈은 다른 장면으로 이어졌다. 내 꿈속에서 그 골목길은 현실을 떠나 동화적 환상으로 이어지는 터널 같은 역할을 했다.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꿈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울음이었다. 염리동의 삼층집은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집이었다. 명절마다 그 집에 친척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른들은 친척들이 예전처럼 자주 모이며 가깝게 살 수 있도록 구심력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작은아버지네 가족이 필리핀에 이민을 가면서 염리동 삼층집은 우리 가족과 더는 상관이 없는 장소가 되었다. 서로 자주 얼굴 보기 어렵게 된 시간 동안 우리 사촌 형제들은 각자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서로 너무 달라져 버려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따돌림 피해를 당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성격이 변해, 말수가 적고 혼자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는 특이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친척들과 사촌들은 나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들에게 피해의식을 쌓아갔다.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나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전면적으로 해체되었고 나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나는 자꾸 같은 꿈을 꾸었다. 나와 세상이 불화하지 않았던, 나와 사람들이 서로 스스럼없이 대하는 방법을 알았던 시간 속으로 돌아가는 꿈들을 반복해서 꾸었다.

 


 

#시간

이따금 나는, 내 기억 속에 빈틈으로 남아 꿈속의 환상으로 채워지던 그 골목길이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었는지 다시 확인하러 염리동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풀리지 않는 구직활동으로 낙담해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던 2016년 어느 가을날 밤에, 지하철 내 공기가 답답해 찬 바람을 마시며 걷고 싶던 차에 충동적으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눈앞에서, 현실과 환상, 기억과 꿈은 한 화면 위에 살포시 겹쳐졌다.

염리동이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맞닥뜨렸을 때 내가 특별히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은, 그때 당시에 나는 오히려 다분히 낭만적인 기분으로 재개발 현장의 풍경을 즐겼다. 그 풍경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될 끔찍하고 참혹한 풍경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삶을 살아내느라 분주히들 살아갔을 한 시대의 사람들을 살려내고 담아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서, 퇴역을 앞두고 잠시 기능을 멈춘 채 그들의 시간을 돌아보는 도시구조물 집단의 모습은 일면 위로가 되는 측면이 있다고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장소마다 다르게 흐른다. 자본이 집중되는 정도에 따라 한 장소의 간판과 건물과 풍경과 사람들의 의식은 활발하게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수십 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기도 한다. 변화는 발전의 동력이지만 동시에 예측 불가능성이고 불안감이다. 사회적 시간은 사회의 생산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시간이고, 내 밖에서 나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시간이다. 내가 나의 삶과 그 주변 요소들에 대한 주도력을 서서히 길러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속도의 시간이 아니다.

아마 그래서, 사회적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혹은 아예 멈춘 장소에 갔을 때 도시인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염리동의 그 무인지대 속에서, 나는 내 외로움을 외로움인 채로 내버려 둘 수 있었다. 사람을 위하고 사람과 관계 맺기 위한 기능적 목적에 충실하게 창조된, 그러나 이제는 버려진 자기들의 돌로 된 육체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며 자기 존재의 가치를 되묻는 건물들의 침묵을 향해서, 나는 내 속에 오래 묵어 있던 외로움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간을 멈춘 채 기다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이루는 기억 속의 중요한 파편 하나를 영영 잃어버린 채 안타까워하게 되지 않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축대와 난간이 있는 오르막길에서 이어지는 골목길을 마주하면서,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었던 세상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하나를 회복한 셈이었다.

 

 


#자기혐오

염리동 재개발 현장을 예쁘게 찍어간 사람이 내가 처음도 아니었고, 현장의 풍경을 도시의 시간에 대한 생각으로 풀어낸 사람도 나 혼자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 감상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었다. 감상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비록 그 감상을 풀어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솔직하게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만약 그 감상이 애초에 거짓된 대상이나 풍경을 보고서 느끼고 형성된 감상이라면 그 감상은 윤리적인가, 그 감상을 풀어낸 사람은 책임이 없는가.

뒤늦게 구글에 '염리동 재개발'을 검색해보고서 나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염리동은 철거민 투쟁이 대대적으로 조직된 곳이 아니었고, 투쟁이 널리 알려져 광범위하게 연대가 건설된 투쟁 현장이 아니었다. 나는 염리동 철거민 중 얼마만큼이 철거에 반대했는지, 철거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에 대한 건설업체와 용역업체의 행패가 어느 정도까지 폭력적이었는지 아직도 별로 잘 모른다. 나는 건물들만 찍고 다녔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은 건물일 뿐이었다. '오마이뉴스'에 보도된 '2015반빈곤권리장전' 실천단의 활동 내용을 통해 확인할 때 염리동 철거민들은 최소한 20157월까지는 재개발에 반대하는 조직적 활동에 한창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싸우고 있는 사람은 싸우고 있는 사람대로, 싸움이 아닌 다른 형태로 삶을 이어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또 그 나름의 현장에서, 사람의 시간은 각자의 치열한 속도로 달리고 있다.

염리동의 시간이 멈춘 것은 그 치열함들을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쫓겨난 치열한 시간을 보지 못하고 남겨진 멈춘 시간만을 본 사람들이 멈춘 시간의 적막함과 포근함만을 소비하고 돌아가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 가운데 나 자신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비난하지 않기는 쉽지 않았다.

 

 


# 마을

오늘날 염리동이 사진 찍는 취미가들의 명소로 사랑받게 된 직접적 원인은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재개발 현장으로서는 이례적이게도 철거가 더디게 진행되어, 주민 이주가 상당 부분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마을 건물들이 대체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사람이 사라진 마을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 둘째, '염리동 소금길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 곳곳에 벽화, 도색 및 특색 있는 노란 색깔의 가로등과 전봇대 등이 설치되어 있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점이다.

내가 대충 인지하기로는 대략 2014년 무렵부터 몇몇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시민기자단 소속 기자들이 염리동을 찾아 '소금길'을 산책하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 기사를 올리고 있다. 구불구불하고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인해 우범지대화된 달동네를, 범죄예방디자인에 입각한 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안전하고 활기 넘치는 마을로 되살려냈다는 내용의 글들이 반복되었다. 염리동이 우범지대화된 것이 골목길이 구불구불하고 어두컴컴한 탓이라는 설명은 거짓말이다. 염리동의 골목길은, 내 아버지가 그 길을 따라 중학교에 다니던 50년 전에도 이미 좁고 구불구불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우범지대를 낳는다면 염리동은 50년 전부터 우범지대였어야 했다. 현실의 염리동을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은 다른 진실을 말했다. 염리동의 좁고 구불구불하고 기복이 심한 골목길을 따라, 내 할머니는 갓난아기 시절의 나를 일부러 업고서 떡과 만두를 팔러 대흥동 시장길을 오가며, 동네 상인들에게 손자인 나를 자랑하고 다니셨다고 했다. 내 발로 뛰어다닐 나이가 됐을 무렵의 나는 사촌 동생과, 사촌 동생의 친구들과 함께 염리동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니며 놀았다. 차량이 들어올 수 없는 좁고 경사가 심한 골목길은 동네 아이들에게 안전한 놀이터가 되어 왔다.

마을공동체가 건재할 때 골목길은 우범지대가 되지 않았다. 염리동의 골목길이 우범지대가 된 과정은 2003년부터 시작된다. 지자체와 건설자본은 염리동에 대한 재개발 계획을 2003년부터 추진했으나 당사자인 주민들에게는 그 사실이 2008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재개발이 진행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언제부터, 어떤 일정에 따라,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주민들에게 전혀 소통되지 않는 상태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불안감에 휩싸인 주민들 중 일부가 각자의 판단에 따라 마을을 떠나 이주하자 마을에는 군데군데 빈 집이 늘어났고, 이때서야 비로소 골목길이 우범지대화되었다. 골목길을 우범지대로 만든 것은 건설자본과 지자체에 의해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재개발 사업, 그로 인한 마을공동체의 해체였다.

'소금길 프로젝트'는 기약도 소통도 없이 늦춰져만 가는 재개발 사업이 마을 주민들에게 준 고통 속에서 태어났다. 우범지대화되어가는 마을 속에서 어찌 되었든 살아가야 했던 주민들이 '소금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마을공동체 재구성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소금길 프로젝트'는 재개발에 맞서 마을을 되살려내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재개발로 사라져갈 운명을 앞둔 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염리동 주민자치위원장 홍성택 씨는 2014429일 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본 논리에 얽매인 재개발 때문에 마을이 정체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재개발이 마을의 물리적 실체를 파괴하고 철거할 수는 있지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마을을 밝고 활기찬 곳으로 가꿔가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종의, 총구 앞에 꽃으로 맞서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묵언의 저항이라고 나에게는 이해되었다. 서울시와 마포구청은 염리동 철거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일에는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 '소금길 프로젝트'에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재개발의 비민주성과 갈등을 가리고 밖에서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게끔 포장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많은 기업들 역시 '소금길 프로젝트'를 위해 페인트 등을 후원했다. 언론과 각 기업 및 공공기관의 시민기자단 블로그들은 범죄예방디자인이 적용된 염리동의 범죄 감소 효과를 고무적으로 보도했다.

그것은 상처 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오마이뉴스' 이외의 어느 언론도 '소금길 프로젝트'가 재개발로 사라져 버릴 운명을 앞둔 마을 위에 그려진 그림임을 보도하지 않았다. 오늘날 마을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과 마을 전체가 미술작품이 되어 있는 것, 단지 사진 찍기 좋은 풍경을 만드는 '예쁜' 요소로만 여겨지는 이 둘 모두가 실은 재개발의 비민주성과 일방성의 직접적 결과물임을 다루거나 말하는 매체는 현재까지 찾지 못했다.


 


 

#중첩

염리동은 중첩의 공간이다. 이곳에는 과거 소금마을이던 시절부터 이 마을이 간직해 오던 활기찬 모습, 재개발 사업의 일방적이면서도 더딘 추진으로 인해 마을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시절의 모습, 그리고 마을이란 어떠한 장소여야 하는가를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던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텅 비어 버린 골목길의 풍경 위에 겹쳐져 있다. 그리고 그 골목길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몸 위에도, 어린 시절 그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시절의 나와, 지독하게 외로운 시절을 거쳐오던 나, 그저 예쁜 사진을 찍고 싶었던 나와, 사진 찍는 맑시스트가 되어 다시 내 사진들을 되짚어보고 있는 내가 겹쳐져 있다.

내가 지금까지 찍어 온 염리동의 사진들이 그 공간 속에서 생존해왔던 사람들에 대한 의도치 않은 조롱인 것처럼 느껴져 사진을 모두 지워버릴까 하는 마음에 잠시 사로잡혀 있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다시 살펴보았다. 벽화는 마을 주민들 자신의 자치적, 대안적, 저항적 움직임의 흔적이었다. 그것이 재개발로 사라져 소용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주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 말하며 벽화를 그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예쁘게 담은 사진들은 어떤 점에서는 벽화를 그린 주민들의 바람에 부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지금도 어디선가 싸우거나 혹은 살아가고 있을 철거민들에게 이 사진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에 여전히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 염리동의 겉모습이 예쁘다는 사실 그 자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예쁨은 가볍고 단순하게 다뤄질 때는, 그 예쁨을 창조해낸 사람들... 그 공간 속에서 생존해왔지만 폭력적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의도치 않게 상처 입히고 적대하는 맥락에 배치될 수 있었다. 그 예쁨 속에 여러 많은 이야기들, 맥락들이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 사진 속에서 잘 다뤄져야 했다. 결국에 내가 찍고자 하는 사진은, 만약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구에게 연대함으로써 아름다운 사진인가?' 하는 질문을 피해갈 수 있는 종류의 사진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 사진  기고 강병준 ('프로젝트 레고' 활동가, 기계 08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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