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칼코마니 모양 나비가, 아니 나비, 아니 나방 모양 데칼코마니가 날아온다. 날아와 앉는다. 황정은의 소설 위에. 0. 좋아하는 마음보다 좋아한다는 말 먼저 좋아한다는 문장만이 만들어내는 파동이 있다. 그 파동을 떠올리면 잔잔한 수면,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마음의 물에 닿는 순간, 원뿔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뛰어오르는 물방울, 퍼져가는 파문과 떨림이 떠오른다. 기호나 취미, 사물이나 사람, 나아가 이야기나 감각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좋아한다는 문장은 분명한 무게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좋아한다는 문장을 ‘잘’ 설명할 방법에 대해 질문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 존재를 소개하고 싶나요? 당신 주변의 이들도 그 존재를 좋아하길 바라나요? 만약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
▷Now playing Psychotic beats, Pati Amor- (킬링이브 OST) 대한민국을 강타한 OTT 서비스에 남들보다 빨리 눈 떠 넷플릭스, 왓챠에서 꼭 봐야 한다는 드라마, 영화들은 일찌감치 정복한 상태였다. 이제 드라마를 5분만 봐도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짬’이 생겼고 웬만한 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각종 SNS 광고에서 접하게 된 것이 였다. 두 여성 주연에 청불 범죄 스릴러라니, 이제까지 없던 조합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는 빈, 베를린, 런던 등 세계 각지를 배경으로, 그리고 영국 정보국 요원 이브(산드라 오)와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 두 주인공을 축으로 진행된다. 이브는 보안국 M15에서 일하다가 무능한 상사에게 욕을 퍼부..
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 미국은 소비와 쾌락의 시대를 맞이했다. 전쟁 특수에 따른 유례없는 호황 속에서 젊은이들은 재즈와 스포츠에 열광했고 여가, 섹스, 자유분방한 생활이 강조되며 1920년대를 소란하게 만들었다. 파티가 커지고 쇼는 대담해졌으며 빌딩들은 높아졌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삶의 지표를 잃어버린 채 방황했다. ‘재즈 시대(the Jazz age)'라 불린 이 시대는 그야말로 방종과 열광의 시대였다. 황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했고 도덕적 가치와 이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미국의 시인 겸 평론가 말콤 카울리(Malcom Cowley)는 당시 젊은이들의 모습을 “우리 모두는 술에 취했다. 우리는 전쟁을 겪어냈고 살아남았다. 우리는 샴페인 병을 들고 거리에서 춤을..
1.인터넷, SNS의 발달로 뉴스나 정보에 대한 접근이 숨쉬기만큼 쉬워진 시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넘실거리는 정보에 온몸을 적시는 세계. 2019년을 살아가는 이들 중 많은 이들, 그리고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독자는 그런 때와 장소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공기처럼, 공기 속 수분처럼 자연스러워진 그 수많은 정보는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단비일 뿐인가. SNS와 뉴스, 정보로 이어지는 단어들의 연결 속에서 어느 정도는 진부해져 버렸지만, 아주 조금은 고민해볼 만한 물음표를 잠시 붙잡아보자. 2019년 7월 10일 각종 매체는 배우 강지환이 성폭행 및 성추행 혐의로 체포됐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자신의 집에서 회식을 하던 중 드라마 외주 여성 스태프 2명을 각기 성추행, 성폭..
* “뭐 그래 봐야 저도 일개 한남이겠지만. ‘왜 나한테 반성하라고 해~~!!!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에!!! 이 버팔로 새끼야!!’ 라고 빽빽대며 쿵쾅대지 마세요. 추하니까요. 그거 일일이 받아줄 에너지 없으니 억울하면 메일 보내세요. 답장 꼬박꼬박 보내드립니다. 에타 같은데 올려서 익명 댓글로 자위할 생각하지 마세요. 짜증 납니다. 더 이상 자신을 한심하게 만들지 마세요. 이미 충분하니까.” - 공일오비 10호 中 * 제안과 권유는 사실 질타, 야단과 그리 다르지 않다. 과거의 ‘가’라는 언행이 잘못되었으니 ‘나’라는 언행은 어떠한가에 대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분위기와 어조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둘은 거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제안이나 야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한국 남성’..
일전에 나는 대뜸 수수에게 그랬다. “우리 여행 가자.”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받아 칠 줄 알았던 녀석은 나를 빤히 보다가, 들고 있던 젤리를 입에 휙 던져넣고는 그랬다. “유럽. 겁나 멋있게.”“파리.”“받고 체코.”“콜.” 그 뜬금없는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에펠탑 보면서 와인 마시고 싶다, 와인 마실 줄은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아 책을 펼치며 방금 한 대화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머릿속 여행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베르사유 궁전이, 루브르 박물관이, 센강이, ...... 세상에, 이대론 안되겠다. 당장이라도 여행계..
우울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나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우울도 각양각색이라 결국 내 세계의 이야기밖에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초록, 호수. 이들과 나는 딸, 친구, 애인으로서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과 그들 각자만의 우울을 하나씩 내 삶 안으로 보듬으면서 내 세계는 두터워졌다. 우리 아빠를 사랑한 덕에 초록을 좋아할 수 있었고, 초록에 대한 애정과 내 어설픈 동행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호수를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공일오비의 화폭을 빌려 부족한 솜씨로나마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울의 이야기를 풀어내본다. 아빠> 엄마아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단단한 뿌리를 ..
참여/ 이네, 응팡, 노랑, 베개, 나루, 두별, 말랑, 재찬 영화를 본 뒤 남은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나 아닌 타인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할 때. 그 순간의 아쉬움을 모아 우리는 함께 영화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연희관 015B」에서 다루고 싶은, 다뤄야 하는 작품을 고민한 끝에 청소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 두 편 과 를 골랐다. 두 영화 모두 관객에게 불편함을 던지지만 각자만의 색깔로 서사를 펼친다는 점에서 다르다. 불편함을 담아내는 서로 다른 그 미숙함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다. 타짜, 추격자, 황해, 도둑들, 1987. ‘배우’ 김윤석이 연기한 영화들이다.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인 영화 을 두고 ‘이런 영화가 김윤석에게서 나올 줄 몰랐다’는 말이 ..
들어가며: 과정이 아닌 존재의 청소년에 대하여 ‘한국 영화’를 떠올린다. 깡패나 조폭은 꼭 있을 것 같고,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도 한 명쯤 나올 것 같고, 돈에 눈이 멀어 윤리의식 따위 개나 줘버린 기업 총수도 나올 법하고, 무모하게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 캐릭터도 그려지고…. 줄거리와 인물 소개, 출연 배우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훤히 보이는 틀에 박힌 영화들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이 웃긴다고 생각할 때쯤, 문득 이러한 영화와 그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롭거나 악덕하거나 비열하거나 순수하거나, 그들은 모두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에게는 ‘성인 남성’이라는 주인공 디폴트값이 너무 깊게 박혀버려 더 이상 다른 인물들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
0.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 낙제점을 받은 ‘자소서’를 낼 수 없었기에 빈 화면을 띄워 두고 쓸 것들을 생각한다. 처음 던져야 하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나를 향했다. 그래,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답을 낼 수 없어 어려웠던 것 같다. 늘 누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묻는다면 나는 몇 분이 지나도 확신하며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웠을 뿐, 정말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현재진행형의 기쁨을 여러 번 무시하고 진짜는 따로 있을 거라고 최면 걸었다. 내가 ‘좋아해도 되는 것’들을 질문하고 살았다. 피곤하게 눈치 봤다. 미성년의 나는 무서운 게 많아서,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해댔으나 자신에게 한 마디도 물어준 적 없었다. 좋아하지 않으면 진심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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